▶ 문명과 혁명의 남성성과 여성성
▶ 북미 최대 2만년 전 고대문명 유적지
▶태양력·피라미드·인신공양의 제례문화
▶모도티·칼로… 두 여성 예술가의 자취
6월 말 멕시코에 가기 전, 그 나라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타코와 부리토 같은 몇 가지 먹을거리들, 드라마틱한 생애와 화려한 색감의 작품들로 유명한 예술가 프리다 칼로, 마야 문명 유적지, 그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늘 한국과 수위를 다투는 긴 노동 시간 정도였다. 마침 예술가들의 도시로 유명한 멕시코의 할라파(Xalapa)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게 돼 일행과 함께 로드 트립을 계획했다.
그런데 웬걸, 6월 초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후보자들이 갱단에 의해 살해된 사건들은 멕시코행 자체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최근 그 나라를 다녀온 지인들은 로드 트립 계획에 모두 손사래를 쳤다. 너무 위험하다는 염려에서였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의 도시들을 점령하다시피 한 마약 카르텔 외에도 수도인 멕시코시티와 그 근교 도시들에서도 살인 사건이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는 거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스러웠지만 떠나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는 이제까지 한 여행 중 가장 흥미롭고 인상 깊은 여행이 됐다. 여러 명이 함께 최대한 안전하다는 도로를 이용해 날이 밝을 때만 움직였기에 별일이 없기도 했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그에 내재한 본질적인 무엇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선입견에 의해 강화된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한 여정이었다.
■이긴 자를 제물로 바친 문명
멕시코는 북미 최대 고대 문명 유적지로 유명하다. 대략 2만 년 전부터 시작된 멕시코의 고대 문명은 동남부 지역의 올메카(Olmeca), 중부의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남부의 마야(Maya) 등으로 세분되는데 이는 이후 아즈텍(Aztecs) 문명으로 이어진다. 이 중에서 우리가 방문한 곳은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유명한 테오티우아칸과 일반 시민들의 거주지 및 오갔던 길들이 양호하게 보존된 칸토나(Cantona) 유적지였다.
테오티우아칸은 워낙 유명한 유적지다.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관광객들이 2,000년 전 인간들이 맨몸으로 건설한 어마어마한 크기와 높이의 피라미드들 사이를 누비는 모습 자체가 장관인 곳이었다. 이에 비해 칸토나는 ‘이런 곳에 유적지가 있단 말이야?’ 싶을 정도로 한적하게 외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일행 외에는 멕시코인 가족 한 팀밖에 없을 정도로 방문객도 적어서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다.
멕시코의 고대 문명들은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태양력과 피라미드 건축술, 인신공양의 제례문화를 공유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문화의 바탕에는 주위 부족과의 끊임없는 전쟁이 있었다.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이들 중 일부를 인신공양하며 매일매일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를 기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남성 전사의 호전적 남성성은 최고의 가치로 칭송받았다.
칸토나 유적지에는 각 부족을 대표하는 남성 전사들이 지금의 축구 경기와 비슷한 경기(Ball Game)를 했으리라고 짐작되는 장소들이 수십여 개 발굴됐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 한편에 설치된 스크린에서 이 경기를 재연한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한 부족 선수가 벽을 향해 찬 공을 다른 부족에서 받아내지 못하면 지게 되는, 일종의 온몸을 사용한 족구 스타일의 경기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경기가 단지 전사들의 호전성을 훈련하기 위한 용도로 치러진 것이 아니라 인신공양 제례의 일부였으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진 이들이 진 쪽이 아니라 이긴 쪽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고대 멕시코인들에게는 죽음 이후 신과 함께 하는 세상을 인간 세상보다 훨씬 가치 있는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화폐가 신으로 떠오른 지 오래인 오늘날 인간은 영생을 꿈꾸며 축적에 열을 올린다. 이 와중에 화폐 축적에 방해가 되는 삶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소거된다. 어떤 문명이 더 야만적인가. 삶의 흔적이 사라진 유적지 폐허에서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른 질문이다.
■혁명기의 예술가, 티나 모도티와 프리다 칼로
멕시코에 호전적 남성성을 바탕에 둔 문명만 존재했던 건 아니다. 남부의 해안가 테우안테펙 지역은 오래전부터 모계 사회가 존재했으리라 추측되는 곳이다. 멕시코 국립 인류학 박물관에서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여성 신체상들을 볼 수 있는데 내륙 기반 문명이 찬양한 전사적 남성 신체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이 지역 경제와 가족 문화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사진가 티나 모도티(Tina Modotti, 1896-1942)가 테우안테펙에서 찍은 사진들은 어머니이자 노동자인 여성들의 생명력을 강렬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그녀는 멕시코 혁명의 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1929년께 이 지역을 찾았다. 스페인 식민 지배에 뒤이은 오랜 독재에 저항해 1910년 시작된 무장 투쟁은 공식적으로는 1917년 혁명군이 승리하고 입법의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1920년대 내내 내전이 이어졌다. 이 시기 멕시코는 사회주의, 아나키즘, 자유주의 등 다양한 사상의 용광로로서 외국인 혁명가와 예술가들을 환영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미국에서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로서 노동자, 영화배우, 누드모델로 일했던 모도티는 혁명기 멕시코의 모습을 독특한 시각으로 담은 사진 예술가로 성장했다. 나는 일행 중 오랫동안 모도티의 열렬한 팬이었던 이를 통해 이번 여행에서 처음 그녀에 대해 알게 됐다.
모도티는 프리다 칼로(Frida Kahlo)와 깊은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칼로의 예술세계와 멕시코 혁명에 대한 열광(1907년에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생일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사회주의적 신념은 흔히 남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영향력으로 설명된다. 특별한 관계의 두 사람이었던 만큼 남편의 영향력이 크기는 했겠으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세 사람의 관계와 작업은 당대 멕시코 사회의 다이내믹한 변화 속에서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있다.
17세의 나이에 당한 치명적인 교통사고로 몸이 불편해져 이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칼로는 자신의 집에 당대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을 초대해 활발히 교류했다. 모도티도 그중 한 명이었다. 1927년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활동한 모도티가 칼로에게 사상적으로 미쳤을 영향력이 짐작된다. 칼로 또한 멕시코의 민중적 전통에 대한 관심을 유럽인 모도티와 적극적으로 공유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멕시코 전통 의상이 바로 테우안테펙 지역 의상일 정도로 이 지역 사람들의 삶과 전통에 관심이 많았던 칼로는 모도티의 테우안테펙 행과 그곳에서의 작업을 매우 기뻐하며 기대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두 여성 예술가의 작품은 매우 다른 양상을 띤다. 일찍이 이 두 여성 예술가를 함께 다룬 다큐멘터리 ‘Frida Kahlo and Tina Modotti’(1984·감독 로라 멀비)는 칼로가 내면의 고통과 상처에 집중한 작품을 내놓은 데 반해, 모도티는 거리의 노동자와 여성 등 혁명의 외부적 기운을 담은 작품 활동을 했다고 비교한다. 이는 태어난 집에서 평생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칼로와 이탈리아와 미국, 멕시코와 유럽을 넘나든 모도티의 대조적인 행적과도 연관이 있다. 그러나 두 여성 예술가는 모두 멕시코 혁명과 그 여파라는 시대적 기운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해 한 시대 획을 긋는 작품들을 남겼다.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을 납작한 언어로 단일하게 해석할 수 없는 좋은 사례다.
이번 여행에서는 들르지 못했던 테우안테펙 지역을 언젠가 방문하는 날이 올까. 멕시코에 닿기 전 느꼈던 두려움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귀국일이 아쉬웠다. 멕시코시티에서 칼로와 모도티의 흔적을 찾을 때마다 다시 멕시코를 여행하는 날이 오기를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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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