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달러 트레이더조 에코백 품귀 현상
▶친환경 소비 상징 넘어 ‘개념 시민’ 표식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영국 던트 서점 등 유명 장소 다녀간 경험·개인 취향 드러내
▶ 유명 브랜드, 너도나도 에코백 굿즈 출시
▶더는 ‘에코백 vs 명품백’ 구분 의미 없어져
▶“최소 7100번은 써야 환경 보호 효과”
▶소비 조장 마케팅 ‘그린워싱’ 우려도
“가방 같은 패션 소품은 내가 어떻게 타인에게 보이는지를 좌우하잖아요. 남들도 다 드는 가방으로 내 몸을 꾸미고 싶지 않아요.”(25세 이수영씨)
“희소하고 특별한 가방은 고민 많이 안 하고 구입해요. 옷과 색을 맞춰 코디하기도 하고요.”(24세 한채연씨)
대학생들에게 ‘요즘 드는 가방’에 대해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다. 이렇게 자부심이 묻어나다니 이른바 ‘명품’이라 불리는 유명 브랜드 가방 이야기인가 싶지만, 아니다. 이들이 지칭한 가방은 공짜 증정품으로 받거나 몇천 원으로도 살 수 있는 ‘에코백’이다. 에코백은 ‘생태계(ecology)에 이로운 가방’이라는 뜻. 일회용 비닐봉투 사용을 줄이기 위해, 또는 동물 가죽 사용을 줄이기 위해 주로 천으로 만든 가벼운 가방을 뜻한다.
윤리적 소비의 상징이었던 에코백이 언젠가부터 ‘잇템’(많은 사람이 꼭 갖고 싶어하는 물건)이 됐다. 최근 미국에선 디자인이 특별하지도 않은 식료품점 트레이더조의 에코백이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는 뉴스가 떠들썩하게 쏟아졌다. 에코백을 놓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가방은 강력한 자기 표현 수단이다. 신분과 부의 척도로 기능하기도 한다. 몇 달치 월급을 가방 하나에 쏟아붓고, 매장이 문을 열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오픈런’을 하면서까지 가방을 사려는 것도 가방이 가방 이상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벌어진 겨우 2.99달러(약 4,000원)짜리 트레이더조 에코백 품귀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트레이더조는 지난 2월 출시한 한정판 에코백이 품절 대란을 빚자 1인당 구매 개수 제한 조치까지 취했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의 트레이더조 에코백 재판매 가격은 500달러(약 68만 원)까지 뛰었다. 튼튼하고 늘어짐 없는 소재라지만, 캔버스 가방으론 이례적인 가격이다. 실용성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광풍 수준의 인기다. 미국의 한 틱톡 이용자는 프랑스 고가 브랜드 고야드 가방과 트레이더조 에코백 사진을 함께 게시하고 “2.99달러짜리 트레이더조 가방이 고야드 미니백과 같은 에너지를 준다”고 적었다. 고야드 미니백의 한국 백화점 판매 가격은 약300만 원이다.
에코백이 환경 친화형 가방이라는 용도를 한참 벗어나 소비되고 있다는 뜻이다. 에코백의 역사는 영국 패션디자이너 안야 힌드마치가 ‘나는 플라스틱 가방이 아니다’라고 적힌 흰색 천가방을 내놓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환경 문제에 관심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고 친환경 이미지를 얻기 원하는 기업과 단체들이 에코백을 만들어 판매하거나 뿌렸다.
자산 규모뿐 아니라 ‘경험’이 곧 계급 상징이 된 경향도 에코백 선호도를 끌어올렸다. 특정 단체, 장소, 브랜드 등의 이름이 적힌 에코백은 드는 사람의 해외 여행 이력, 취향, 취미 등을 보여준다. 대학생 김정현(23)씨는 지난해 교환학생으로 갔던 태국 탐마삿대학의 에코백을 자주 들고 다닌다. 김씨는 “해외 기관명을 적은 프린트가 외국 생활 경험이 있는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경험을 공유하는 매개가 된다”고 말했다. 클래식 음악 애호가인 직장인 허명현(33)씨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등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 공연장을 방문할 때마다 기념품점에서 에코백을 구입한다. 그는 “무형의 음악 장르를 물질 형태로 기념한다는 의미로 음악 관련 장소를 방문할 때마다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을 꼭 사는 편”이라고 말했다.
영국 런던의 서점인 던트북스나 런던 리뷰 오브 북스의 에코백, 미국 뉴욕 서점인 스트랜드 북스토어 에코백, 미국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정기구독자에게 주는 에코백 등도 국내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트레이더조 에코백의 인기도 브랜드 특성과 연관이 깊다. 트레이더조는 친환경·유기농 상품 마트로, 팬덤이 강하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취향이 문화자본이 되는 시대를 맞아 에코백을 사용한다는 건 개념 있는 시민이자 세대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가 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학보 바시티는 에코백에 대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나 영국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서점의 에코백을 메는 것으로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며 “에코백은 사회적 화폐의 한 형태”라고 규정했다. 식료품점, 서점, 시사 주간지 이름이 일종의 패션 브랜드처럼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엔 에코백이 뜻밖의 장면에서 화제가 됐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0일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을 떠나면서 환경 보호를 강조하는 문자가 적힌 에코백을 든 것이 설왕설래를 낳은 것. 공교롭게도 국민권익위원회가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관련 비위 신고 사건을 “위반 사항이 없음”으로 종결한 날이었다. “앞에선 에코백, 뒤에선 명품백이냐” 식의 비판이 일었지만, 요즘 에코백과 명품백의 경계는 이전보다 다소 흐려지기는 했다. 에코백이 예술 전시의 필수 굿즈(기념품·상품)가 됐고, 세계적 고가 브랜드들이 에코백 시장에 뛰어들면서다.
에코백은 저렴한 소재, 재활용 소재, 세탁이 쉬운 소재로 만들어야 취지에 맞다. 고가 브랜드들은 이와는 다르게 모양은 에코백이지만 소재는 값비싼 에코백을 내놓고 있다. 박혜수 패션 에디터는 “브랜드 전통은 지키면서 가격을 상대적으로 낮추고 실용적 요소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친환경이란 의미는 퇴색되고 에코백이 또 하나의 백의 범주로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다.
에코백을 VIP 고객 대상 선물로 활용하는 브랜드도 있다. 심희정 명품 브랜드 컨설턴트는 “명품 업체들이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는 홍보 마케팅 수단으로 에코백을 경쟁적으로 내놓으면서 소재를 고급화하고 유명 작가와의 협업도 시도하고 있다”며 “에코백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에코백의 정의가 모호해지다 보니 그린워싱(위장 환경주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에코백을 비롯한 친환경 용품의 핵심은 한 번 사거나 얻어서 최대한 많이 사용하는 데에 있지만, 에코백이 또 다른 사치품으로, 혹은 마케팅 용품으로 소비되기 때문이다. 2018년 덴마크 환경식품부는 면 소재 에코백은 최소 7,100번을, 유기농 면 소재 백은 2만 번은 써야 환경 보호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장은 “에코백 생산 과정의 탄소배출량 등을 감안하면, 친환경이라는 본연의 취지에 부합하려면 반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며 “사용하지 않는 가방을 취미처럼 모으는 것은 ‘에코’라는 이름에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제로웨이스트(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재활용품 사용을 늘려 궁극적으로 쓰레기를 없애는 것)의 제1 덕목은 거절”이라며 “소비자들은 불필요한 소비를 조장하는 에코백 마케팅을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
김소연 기자ㆍ서진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