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트코인 ETF 성지 된 홍콩
▶ 아시아 첫 가상자산 현물 ETF
▶미국과 달리 현물 매수·상환
▶장외거래로 가격 변동성 줄여
▶첫 거래일 198억원 순유입
▶한국 가상자산 인프라 부진
“왜 한국에서는 가상자산 상장지수펀드(ETF)가 출시되지 않는 겁니까.” 최근 홍콩 금융 중심지인 센트럴에서 만난 현지 금융업 종사자들 대부분이 기자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등 매번 궁색한 답변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데릭 왕 보세라자산운용 전무 역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보세라자산운용은 지난달 홍콩에서 아시아 최초로 가상자산 현물 ETF를 출시한 운용사 중 한 곳이다. 센트럴에서 만난 금융사들은 가상자산 현물 ETF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금융 당국과 업계가 오랜 기간 진통을 겪어야 했다고 입을 모았다.
비트코인·이더리움 현물 ETF 출시를 앞둔 홍콩 증권사 빅토리증권의 케닉스 로우 전무이사는 디센터와 만나 “가상자산 ETF는 전통적인 ETF 시장과 비교해 추가로 고려할 참여자가 많다”며 “ETF 출시를 위해 전통 금융사와 가상자산 기업들이 수년간 대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현지 가상자산거래소 OSL의 웨인 황 ETF 프로젝트 리드도 “규제 당국에 가상자산을 설명하는 과정도 오래 걸렸다”며 “특히 ETF 현물 상환 방식 도입은 업계부터 당국까지 생태계 전반에 걸쳐 기술적·제도적으로 심도 있는 협업이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홍콩 가상자산 현물 ETF는 올 초 미국에 상장된 비트코인 현물 ETF와 달리 비트코인·이더리움 실물로 ETF를 매수·상환할 수 있는 현물 상환 방식을 도입한 바 있다. 운용 수수료와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다.
특히 수탁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수탁은 제3의 전문 업체가 ETF 운용사를 대신해 가상자산을 보관·관리해주는 서비스다. ETF 운용사와 기초자산을 분리함으로써 유용·해킹 리스크를 줄여준다.
이들은 가상자산 보험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로우 전무이사는 “해킹 등으로부터 투자자 피해를 막으려면 보험이 핵심”이라며 “홍콩 거래소·수탁사는 가상자산 보험에 반드시 가입하도록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홍콩은 가상자산사업자가 보유한 이용자 자산의 98%를 콜드월렛(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아 해킹하기 어려운 가상자산 지갑)에 보관해야 한다. 자산이 유출되거나 악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다.
장외거래(OTC) 시장도 갖춰야 할 인프라로 지목됐다. 황 리드는 “OTC는 ETF 가격이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유동성을 제공한다”며 “수탁과 함께 중요한 기능”이라고 강조했다. 기관투자가가 장내 시장에서 어려운 대규모 거래를 OTC 시장에서 처리하면 ETF 시장의 가격 변동을 최소화할 수 있다.
홍콩 증시에 상장된 가상자산 현물 ETF 6개는 지난달 30일 첫 거래일에 1470만 달러(약 198억 원)가 순유입됐다. 미국은 비트코인 현물 ETF의 첫 거래일 순유입액(6억 달러·약 8,075억 원)과 비교하면 훨씬 작지만 양국 ETF 시장 규모의 격차를 감안하면 비슷한 수준의 관심이 쏟아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현지에서 만난 금융계 관계자들은 “아직은 기관투자가·개인투자자가 가상자산 현물 ETF 시장에 많이 진입하지 않았지만 연금 상품을 통한 가상자산 현물 ETF 투자도 당국에서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미국 증시가 닫힌 시간대에 홍콩 가상자산 현물 ETF를 거래하려는 전 세계 기관투자가들의 진입도 예상된다. 현재는 중국 본토 투자자들의 홍콩 가상자산 현물 ETF 투자가 금지돼 있지만 수년 내로 중국 정부가 규제를 완화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크다.
이처럼 홍콩은 가상자산 현물 ETF 덕분에 가상자산 수탁, 보험, 지갑 등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 홍콩은 최근 수년간 글로벌 금융 중심지로서의 입지 약화를 우려하며 2022년 가상자산 시장의 중심지가 되겠다고 발표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모색해왔다. 반면 국내 전통 금융 및 가상자산 업계는 미국·홍콩의 행보를 지켜볼 뿐 손발이 묶인 상태다. 가상자산 현물 ETF 발행뿐만 아니라 거래마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관련 인프라 구축을 위한 논의도 진척이 없다. 국내 규제 변화에 대비해 가상자산 관련 펀드를 준비 중인 한 금융사 대표는 “해외에서 이미 거래되는 가상자산 상품들을 한국만 계속 부정할 수는 없다”며 “늦어도 2~3년 후에는 제도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로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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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최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