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칼럼 하나님 나라
2024-05-16 (목)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확장. 화끈한 용어입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확장’이라는 용어는 부침이 많은 용어입니다. 호전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하던 땅따먹기 놀이가 생각납니다. 땅을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땅따먹기를 통해 점점 영토를 늘려가는 이미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이 이러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니, 어찌 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처럼 들리는 듯합니다. 실제 그랬기도 했고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하나님 나라에 붙은 ‘확장’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반성이 필요한 용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확장’이라는 용어가 붙어 있으면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의 영토가 없는데 전쟁 또는 투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보해 나가야 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명백한 오해와 잘못에서 비롯된 진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드러내는 것이지 확장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 않은 영역은 온 우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온 우주의 영역은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지 확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장’이라는 용어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그동안 얼마나 호전적인 종교였는지 모릅니다. 용어 하나가 이렇게 신앙의 형태를 결정짓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사용되는 용어 중 비슷한 결과를 가져온 용어가 또 있습니다. ‘성시화 운동’이라는 말입니다. 성시화 운동은 하나의 도시를 성스럽게 바꾸어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2세대 종교개혁자였던 칼뱅이 제네바 시를 성시화 하려 했던 역사적 시도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요.
성시화 운동 뒤에 있는 생각은 도시가 타락했다는 인식과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세속화를 정죄하는 마음이 놓여 있습니다. 맞는 말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러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성시화 운동의 주체인 그리스도인들과 성시화 운동의 객체인 도시의 주민들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게 됩니다. 나는 거룩하고, 너는 타락했다는 차별의식이 그 간극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되는 순간 성시화 운동은 시혜(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에게 베푸는 것 또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베푸는 것)가 됩니다. 거룩한 우리가 타락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인을 교만하게 만드는 상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확장’이라는 말과 ‘성시화’라는 말은 상대방을 정복해야 하는 정죄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이러한 출발점에서 시작된 복음 전파는 은혜가 아니라 폭력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호전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가장 경계했던 일인데, 오히려 그 일이 발생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추락합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거나 ‘성시화’ 운동을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타락한 도시를 성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거나 투쟁할 필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그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헌신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