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이패션 로우패션 슬로우패션

2024-05-08 (수)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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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패션계 최대행사인 ‘멧 갈라’(Met Gala)가 뉴욕에서 열렸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의상연구소가 개최하는 모금행사로, 글로벌 유명인사들이 화려하고 기상천외한 스타일을 뽐내는 패션계의 연례축제다. 매년 가장 핫한 배우, 가수, 재벌, 스포츠스타들이 그해의 드레스코드 주제에 맞춰 특별 제작한 디자이너 패션을 입고 메트 뮤지엄으로 총출동한다.

초청된 약 400명의 게스트 명단은 행사 당일까지 비밀에 부쳐진다. 때문에 해마다 누가 초청됐는지도 관심거리. 한국인으로는 작년에 한국에서 송혜교와 제니가 날아왔고, 올해는 스티븐 연, 그레타 리, 스트레이 키즈 등이 참석해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스타들이 레드 카펫(실제로는 흰색)을 밟고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는 점에서 ‘동부의 오스카’라고도 불리지만 두 행사는 성격과 규모가 크게 다르다. 할리웃의 오스카는 영화 관계자들만의 시상식이요 축제지만 멧 갈라는 글로벌 셀럽들이 작정하고 유별난 코스튬을 자랑하는 최상의 패션쇼다. 스타들은 너무 화려해서 걷기조차 버거워 보이는 불편한 의상들을 떨쳐입고 나타난다. 장식이 너무 과하거나 드레스의 날개와 꼬리가 너무 크고 길고 무거워서 여러명이 뒤따르며 들고 펴는 모습도 흔히 보게 된다.


또 오스카는 전세계로 생중계되지만 멧 갈라는 파티장으로 들어가고 난 후의 일은 일체 공개되지 않는다. 참석자들도 내부 광경을 소셜미디어에 올리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가장 비싼 모금행사라는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200만 달러를 모금했던 작년에는 일인당 티켓이 5만 달러였는데 올해는 7만5,000달러로 올랐다. 테이블은 가장 싼 것이 35만달러부터 시작인데, 실제로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아무리 많이 기부했어도, 어떤 기업이 테이블을 샀어도, 누굴 초대하고 누굴 앉히느냐는 주최 측 마음대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전설적인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가 있다. 멧 갈라는 그녀가 총지휘를 시작한 1995년 이후 힘과 돈과 명성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2024년 멧 갈라의 주제는 ‘시간의 정원’(Garden of Time)이었다. 그리고 매년 그랬듯 비현실적인 몸매의 스타들이 입이 떡 벌어지게 희한하고 요란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갑옷처럼 두른 채 메트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런 ‘오뜨 꾸뛰르’(하이패션)는 옷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취급된다. 중요한 작품은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영구 보존된다.

한편 이와는 정반대, 대척점에 ‘패스트 패션’이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싸게 사 입고 손쉽게 버리는 옷들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럭서리 ‘하이패션’이 아니라 그 디자인을 재빨리 카피해 대량생산하는 ‘로우패션’이다. 간단하고 빨리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처럼, 최신유행 옷을 금방 사서 일회용처럼 소비하는 패스트 패션문화가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자라(ZARA)’, ‘유니클로(UNIQLO)’, ‘H&M’, ‘SPAO’ ‘포레버 21’같은 브랜드가 그들로, 이런 거대 패스트 패션기업들은 디자인과 생산, 유통과 판매까지 직접 관리하면서 보통 1~2주마다, 빠르면 3~4일, 심지어 하루 만에도 신상품을 만들어 쏟아낸다.

이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의류쓰레기가 폭증했다.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에서 매년 1,000억 벌 이상의 옷이 만들어지는데 이중 30%가 팔리지 않은 채, 혹은 한번도 입지 않은 채 버려져 매립장으로 직행한다. 온라인 구매가 간편해진 만큼 버리는 속도도 빨라진 것이다. 과거 세대처럼 옷을 물려 입고 고쳐 입고 기워 입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구세군이나 굿윌 같은 곳에 기부조차 하지 않고 그냥 버려진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은 옷은 생산부터 폐기까지 어마어마한 환경오염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유엔(UN)에 따르면 패션 산업은 매년 1억7,5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방출한다. 국제 탄소배출량의 10%를 차지하며 이는 항공과 해운 분야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치다. 패스트패션 의류는 저렴한 폴리에스터 합성섬유를 사용하는데 나일론, 아크릴 등 합성섬유 재료는 플라스틱과 유사해 쉽게 분해되지 않는다. 또 이런 의류는 세탁할 때마다 수백만 개의 미세섬유조각이 폐수를 통해 유출된다.


패션산업은 수자원 낭비도 엄청나다. 면 티셔츠 한 장 생산하는데 물 2,700리터가 필요하다. 한 사람이 3년 간 마실 수 있는 양이다. 청바지 한 벌 제작에는 7,000리터가 사용된다. 4인 가족이 일주일 동안 쓸 수 있는 분량의 물이다.

더 무서운 것은 토양오염이다. 북태평양에만 쓰레기섬이 있는 게 아니다. 칠레 북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수마일에 걸쳐 알록달록한 옷들의 언덕으로 뒤덮여있다. 각국에서 버려진 옷 폐기물이 이룬 거대한 ‘쓰레기산’이다. 가나,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나라에도 헌옷 쓰레기산이 있다.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한 의류폐기물을 재활용하고 남은 옷들이다. 쓰레기산은 악취와 함께 독성이 강해 수질과 생태계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우리에겐 다시 ‘슬로우 패션’이 필요하다. 옛날처럼 옷을 직접 만들어 입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품질의 옷을 적게 사고 아껴 입고 고쳐 입고 오래 입어야겠다. 싸구려 유행을 좇는 불나방이 되기보다 자신만의 ‘빈티지 패션’을 만들어가는 것이 돈도 절약하고 환경에 일조하는 일이다. 감히 하이패션은 추구할 수 없지만 로우패션을 남용해서도 안 되겠다. 소중한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다.

<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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