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 10월 캐나다 총선, 투표함이 열리자 중도 우파 집권당인 진보보수당은 충격에 빠졌다. 전체 295석 가운데 겨우 2석만 건졌다. 직전 총선의 169석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정부와 여당이 실업난과 재정 적자 문제 등을 풀지 못하고 연방 부가가치세 확대 등을 위한 입법 폭주를 한 게 결정적 패인이었다. 정당 폭망사를 복기해보면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률 등 경제난은 여당 패배의 공통분모였다. 폭주 정치는 예외 없이 철퇴를 맞았고 무능 정치도 심판을 받았다.
4·10 총선에서 국민의힘은 탄핵·개헌 저지선을 가까스로 넘긴 108석을 얻는 데 그쳐 참패했다. 여권 인사들은 총선 패배를 둘러싸고 낯 뜨거운 책임 전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국민의힘과 보수 정치 세력이 살아남으려면 대변화와 전면 쇄신을 해야 한다. ‘보수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도 “보수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개혁한다”고 역설했다.
국민의힘이 거듭나려면 총선 참패의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는 ‘총선 패배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 무엇보다 지난 대선 때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 후보를 찍지 않거나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 321만여 명의 ‘변심’ 이유를 알아내야할 것이다.
이번에 ‘정권 심판론’이 위력을 발휘한 요인은 분명하다. 첫째, 윤석열 정부가 경기 침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다 ‘대파 파동’으로 상징되는 채소·과일 가격 폭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또 윤석열 정부는 소통 부족 속에 독선의 국정 운영을 했고 공정과 상식을 훼손했다. 여당은 민생 살리기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이·조(이재명·조국 대표) 심판론’에 매달려 외려 역풍을 초래했다. 총선 참패의 가장 큰 책임은 국정 운영의 최고 지휘자인 윤 대통령에게 있다. 선거 사령탑으로서 ‘이·조 심판론’에 몰두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이제는 ‘네 탓’ 싸움을 접고 ‘내 탓’이라고 반성하면서 뼈를 깎는 쇄신에 나서야할 때다.
우선 요동치는 국내외 정세에 대한 깊고 넓은 조망이 필요하다. 현재 신냉전, 블록화,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글로벌 경제·기술 패권 전쟁이 가열되는 가운데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 각국 지도자들은 정권 안정을 위해 ‘자국 이익 우선’을 내걸고 포퓰리즘에 빠져 확장 재정에 매몰되고 있다. 정치 위기가 재정·경제 위기를 초래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향해야할 시대정신은 경제·국익·안보·미래·통합 등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첫 번째 처방은 시대정신을 추구하면서 정교하게 국정 운영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연금·교육 등 구조 개혁과 규제 혁파, 초격차 기술 개발 등을 성공시켜야한다. 그래야 최근 ‘한국 경제의 기적이 끝났는가’라는 파이낸셜타임스(FT)의 뼈아픈 지적을 수용해 재도약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또 소통과 통합 노력으로 정치 복원에 나서고 당정 관계도 수평적으로 재편해야 한다. 인사 혁신은 기본이다. 두 번째로 연대 세력을 넓히는 ‘덧셈 정치’를 해야 한다. 국민의힘은 지난 대선 때 ‘보수·중도 선거 연합’을 통해 0.73%포인트 차이로 신승을 거뒀다. 그러나 그 뒤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나경원 당선인과 안철수 의원 등을 노골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지 기반을 축소시켰다. ‘뺄셈 정치’의 결과다.
셋째, 현장 속에서 실용적인 민생 정책을 발굴해 실천하는 ‘생활 정당’으로 변모하기 위해 우수한 전문가들이 몰려드는 싱크탱크를 만들어야 한다. 1964년 대선 참패에 대한 반성을 토대로 헤리티지재단을 만들어 개인의 자유, 작은 정부 의제 등을 심층 연구함으로써 공화당의 집권 기반을 다진 미국 보수 세력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넷째, 미래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청년 정치 아카데미’를 만들고 실력과 도덕성을 갖춘 ‘새 피’를 적극 수혈해야 한다.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대학생·청년 당원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선거에 출마할 예비 후보들을 미리 영입해 지역에 뿌리내리도록 돕는다.
국민의힘과 보수 정치 세력이 확실히 변해야 폭망의 늪에서 벗어나 생존과 성장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쇄신 의지를 보여주려면 현행 ‘당원 100%’ 전당대회 룰부터 바꿔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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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덕 서울경제 논설실장·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