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표준시
2024-04-08 (월)
이혜진 서울경제 논설위원
1884년 10월 미국 워싱턴DC에서 25개국 대표들이 경도의 기준인 ‘본초자오선’을 정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국가 간 교류가 확대되는 시대를 맞아 시간 기준을 통일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회의에서는 영국의 그리니치 자오선을 기준으로 삼자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영국의 라이벌인 프랑스가 거세게 반발해 표결에 부쳐진 끝에 그리니치평균시(GMT)가 탄생했다. 이후 원자시계를 기반으로 한 ‘협정세계시(UTC)’가 도입됐으나 GMT와는 큰 차이가 없어 일상에서 혼용되고 있다.
140년이 흐른 지금 달의 표준시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우주국(ESA)은 오래전부터 ‘협정 달 시간(LTC)’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이에 따라 유럽의 우주 기관 관계자들이 수년 전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이에 질세라 미국 정부가 최근 미 항공우주국(NASA·나사)에 2026년까지 달을 비롯한 다른 천체의 표준 시간 체계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주요국 정부뿐 아니라 민간 기업들도 달 탐사 프로젝트를 동시다발로 진행하는 상황에서 혼란을 줄이려면 통일된 시간 체계가 필요하다. 달에서 서로 위치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는 위치정보시스템(GPS)을 사용하려면 기준 시간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러나 달 표준시를 정하는 일은 과학적·정치적 이유로 쉽지 않다. 과학저널 네이처는 “지구의 24시간을 기준으로 달의 시간은 56㎲(마이크로초·100만분의 1초) 빠르게 흐른다”고 했다. 게다가 달은 하루의 길이가 29.5일이나 되고 밤이 14일간 계속된다. 지구의 시간 체계를 기준으로 달의 표준시를 정하는 일이 꽤나 어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또 과거 지구 표준시를 정할 때처럼 국가 간 합의 과정에서 난항이 있을 수 있다. 달 시간의 기준 설정에서 주도권을 누가 갖느냐에 따라 우주 패권 전쟁의 전개 양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달 표준시 제정은 인류의 우주 진출에서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주요국들이 달 선점 각축전을 벌이고 표준시까지 정하는 시대에 우리도 우주 개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분발해야 한다.
<이혜진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