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톱타자 이정후와 이치로

2024-03-26 (화) 문상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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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2월 애리조나 피오리아 시애틀 매리너스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에는 100 여 명이 넘는 취재진이 모였다. 주로 일본 기자였다.

캠프가 시작되면서 최대 관심사는 일본에서 포스팅 시스템으로 건너온 이치로 스즈키였다. 기자들은 루 피넬라 감독에게 “이치로가 톱타자를 맡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피넬라 감독은 “글쎄, 이치로가 톱 타자로 적합한지는 모르겠다”라며 다소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시애틀은 전년도 2000 시즌 91승 71패를 마크,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마이크 카메론, 스탠 하비에르, 시즌 도중 영입한 리키 헨더슨을 톱 타자로 기용했다. 기자들에게 시애틀의 테이블 세터는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피넬라 감독은 시범 경기를 치르면서 이치로를 확고한 톱 타자로 염두에 뒀다. 4 월 2일 오클랜드 에이스와의 시즌 개막전에 이치로는 톱 타자로 출장해 5 타수 2 안타 1득점으로 메이저리그 신고식을 했다. 사실 이치로가 영입된 2001시즌은 시애틀에 전력의 큰 플러스는 아니었다.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정도였다. 팀의 프랜차이즈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프리에이전트가 돼 텍사스 레인저스로 떠났기 때문이다.이때까지만 해도 이치로의 기량은 과소평가 된 게 사실이다.

일본 야구와 메이저리그의 캡은 당시에 컸다. 일본 프로야구에서 정상 급으로 기량이 검증된 선수에게 신인상을 시상 하는 메이저리그의 우월감에서도 잘 드러난다.
켄 그리피 주니어, 로드리게스가 떠난 2001시즌 시애틀은 MLB 역사상 한 시즌 최다 116승60패를 기록했다. 전력의 핵심이 빠진 상황에서 이룬 쾌거다.

1997년 이후 4년 만에 아메리칸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치로는 MLB 최다 242개의 안타를 뽑았다. 127득점, 56도루(1위)를 곁들여 AL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했다. 단순히 개인 성적이 뛰어난 게 아니다. 이치로는 팀 플레이어였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신임 봅 멜빈 감독은 지난달 애리조나 스콧츠데일 투포수 합류 때 이정후 질문을 받았다. 멜빈 감독은 “이정후가 톱 타자가 아니라면 충격일 것이다”라며 테이블세터로 시즌을 열 것임을 예고했다.

멜빈은 전임 게이브 캐플러 감독처럼 타순을 수시로 바꾸는 스타일은 아니다. 캐플러는 철저히 세이버메트릭스 기록에 근거한 플래툰 시스템을 선호했다. 대타도 가장 많이 활용했다.

62세의 멜빈 감독은 포수 출신이다. 포수로는 신장(193cm)이 매우 크다. 월드시리즈 우승은 이루지 못했지만 선수단 장악 력 리더십이 뛰어나다. 기록에 근거하지만 감도 고려하는 올드스쿨 타입이다.


시애틀은 2000년 11월 포스팅 시스템으로 이치로를 영입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에1300만 달러 포스팅 피를 건네고 이치로와는 3년 1400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후 그가 과시한 기량으로는 계약 조건이 좋았다 고는 할 수 없다. 입단 때는 underrated 됐다.

SF는 이정후에 6년 1 억 1300 만 달러에 계약했다. 이치로처럼 포스팅으로 입단했다. 야구단 경영을 해서는 안 되는 키움 구단은 강정호, 박병호, 김하성, 이정후 등 팀의 간판선수를 포스팅으로 팔아 운영 자금을 확보했다. MLB 전문가들은 이정후에게 시장가보다 훨씬 높은 연봉을 줬다고 지적한다.

고액 연봉은 선수에게 고스란히 심리적 부담감으로 연결된다. 이를 뛰어넘는 일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이정후에게 이치로는 우상이다. MLB 네트워크의 JP 모로시 기자는 방송에서 자이언츠 팀 상황을 소개하면서 이정후와 이치로의 관계를 설명하기도 했다.

모로시 기자는 이정후를 언급할 때마다 아버지 이종범의 애칭 ‘바람의 아들’의 아들이라고 팬들에게 친근감을 준다. 이정후 입장에서는 명예의 전당 회원 급인 이치로와의 비교 대상은 반길 만한 일이다.

이정후는 아버지 이종점이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활약 때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치로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9시즌(풀타임 7년)을 뛰고 MLB로 진출했다. 풀타임 7년 동안 해마다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렸다. 그러나 MLB로 진출하면서 장타는 포기했다. 톱타자가 되면서 안타 제조기로 변신했다.

2004년에는 MLB 역대 한 시즌 최다 262개의 안타를 생산했다. 7시즌은 시즌 최다 안타 기록이었다. 10년 연속 200 안타 이상은 MLB 최다 기록이다. 2025년 명예의 전당 행이
유력하다.

이정후의 MLB 성공 여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가능성만 갖고 있다. 이치로는 루 피넬라 감독을 비롯해 미국의 전문가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 이정후 에게도 예상을 뛰어넘는 기대를 해본다.

이치로급의 활약은 자이언츠의 부흥을 예고한다. 자이언츠는 2017년 이후 딱 한 차례(2021년) 지구 우승으로 가을 야구에 진출한 게 전부다. 이 기간에 라이벌 LA 다저스는 11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위업을 만들었다.

moonsytexas@hotmail.com

<문상열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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