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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칼럼] 도널드 트럼프의 중용

2024-01-29 (월) 샤디 하미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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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선 경선 주자인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후보직 사퇴 결정을 내리기 며칠 전, US. 버진 아일랜드에 배정된 네 명의 대의원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단 한명의 대의원이 아쉬울 만큼 뉴햄프셔 예비선거의 판세가 초접전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오와 코커스를 휩쓴 ‘트럼프 회오리’의 예상경로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 뉴햄프셔주에선 U.S. 버진 아일랜드 단 한 곳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샌티스 주지사는 공화당을 쥐고 흔드는 도널드 트럼프의 맞수가 될 만한 당내 도전자로 꼽혔다. 그러나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이유로 인해 그는 날갯짓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추락했다.


조 바이든, 트럼프, 버락 오바마, 조지 W. 부시와 빌 클린턴 등 다섯 명의 전임 대통령은 얼굴을 맞대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카리스마와 매력, 서민적인 친근함을 두루 갖추었다. 반면 디샌티스는 선뜻 다가서기 어려울 만큼 말과 행동거지가 딱딱하고 부자연스럽다. 실제로 그는 유권자들과 어울려 대화를 나눠야하는 상황이 닥치면 종종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디샌티스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념으로 충전된 ‘트럼프 시대’에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더러 있다. 대통령제에서는 인성(personality)이 중요하다는 점이 그중 하나다. 능력은, 이론적으론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그리 매력적이지 못하다. 트럼프는 유능한 척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흥미롭고, 거침이 없으며 별나게 재미있다.

하지만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한량없이 역설적인 정치적 지향성이다. 지향성은 뚜렷한 방향을 일관되게 가리키는 성질을 뜻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정치적 일관성이 전혀 없다. 수시로 방향을 바꾸니 도대체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갈피조차 잡기 어렵다. 그래서 역설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트럼피즘은 ‘독단적’이지 않으면서 ‘극단적’이다.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이는 트럼피즘의 이념적 민첩성은 때론 중용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작가인 매튜 이글레시아스는 이를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불안정한 중용’(unhinged moderation)이라는 기억할만한 용어를 사용했다.

공화당은 무슬림 입국 금지라든지 2020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주장은 지지할지 몰라도 경제 문제에 대해서만은 중도적인 입장으로 중심축을 이동했다. 공화당은 더 이상 사회복지연금인 소셜시큐리티 민영화를 원치 않는다.

전 하원의장이자 한때 공화당의 총아였던 폴 D. 라이언은 아직도 잠꼬대처럼 작은 정부 타령을 한다. 그러나 풍선처럼 늘어나는 적자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공화당 정치인들이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 역사사상 가장 큰 규모의 경기부양 패키지를 두 번이나 통과시켰다.

공화당 유권자들의 60%가 지금껏 주장하는 바이든의 ‘선거 도둑질’ 이후, 트럼프화한 공화당은 민주당과 협력해 역사적인 1조 2,000억 달러 규모의 ‘기반시설구축법’과 국내 반도체 제조 및 연구 지원을 위한 2,8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및 과학법’을 제정했다. 공화당이 여전히 불안정한 정당인 것은 확실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유 있는’ 예상과 달리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화전쟁 이슈만 해도 그렇다. 트럼프의 이념적 강도는 그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디샌티스가 전임 행정부시절의 대표적 이슈로 자리매김한 ‘사회적 각성’(wokeness)에 공세를 강화하자 트럼프는 “나는 woke라는 단어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조롱 섞인 반응을 보였다. “다들 이 말을 입에 걸고 다니는데 너무 자주 듣다보니 싫증이 났다. 그건 그냥 그들이 주절대는 용어에 불과하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절반은 woke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한마디로 뜻조차 모르면서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트럼프는 다시 이 단어를 입에 올렸다. 물론 그 뜻을 정의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그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보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뜬구름 잡는 논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미국의 정치판에서 자신의 부정직성과 국가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사실을 미안한 기색조차 없이 당당하게 드러내는 “트럼프의 트럼프다운 정직성”이 수 천만 유권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트럼프를 대단히 위험스럽게 만드는 독특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는 이념에 이끌리지 않기 때문에 이념의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신봉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아이디어와 자신의 위대함만을 믿을 뿐이다.

이처럼 뒤틀린 진정성과 대의명분이나 비전에 대한 무관심은 그의 카리스마와 코믹한 타이밍과 결합해 일종의 수퍼파워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희망이 있다. 좋건 싫건, 트럼프는 일생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정치적 재능인이다.

적어도 예견 가능한 미래에 몇 가지 요인이 합쳐지면서 그에 견줄만한 정치인을 만들어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건, 최소한, 대단히 다행스런 일이다.

<샤디 하미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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