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특별칼럼]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자진 회피

2024-01-15 (월) 루스 마커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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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대법관의 심리 기피신청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연방 대법원의 구성은 대단히 특이하다. 하급 법원에서는 이해충돌 등의 이유로 판사가 특정 사건의 심리를 ‘자진 회피’(self-recusal)할 경우, 다른 동료 판사가 손쉽게 그를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연방 대법관의 숫자는 단 아홉명에 불과하다. 이 중 한 명이 직무수행에서 배제되면 사건 심리결과가 4-4로 갈라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대법원은 지도 의견조차 낼 수 없게 되고 하급법원의 판결은 그대로 유지된다.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에서 다루어지는 사건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건 결코 바람직한 결과가 아니다.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행동강령에 따르면 “부적격 판정을 받지 않은 대법관은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으며, 해당 재판의 심리에 참여해야할 의무를 지닌다.”


그러니 경솔하게 대법관 기피를 요구해선 안 되고, 대법관들 역시 들끓는 여론에 밀려 이같은 요구를 성급히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그러나 법과 상식의 선에서 대법관 스스로 옆으로 비켜서야 마땅한 상황이 존재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2020년 1월 6일에 발생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 관련 6개 사안이 대법원으로 향하고 있다. 문제는 토머스 대법관의 아내 버지니아 ‘지니’ 토머스가 대선결과 불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대법관 윤리강령에 따라 “대법관의 불공정성은 이와 관련한 모든 상황을 소상히 인지한 비편향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 해당 대법관이 공정하게 업무수행을 할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할 때에 한 해 논의할 수 있다.”

“비편파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트럼프 지지자들의 대선불복 운동인 “도둑질을 멈추라”(Stop the Steal) 캠페인에 지니 토머스가 적극 가담한 것이 그녀의 남편인 토머스 대법관의 관련 재판 배제를 논의해야 할 충분한 사유라고 말하지 않을까? 두말 할 나위 없이 대법관의 배우자도 지니 토머스처럼 정치계나 법조계에서 얼마든지 독자적인 경력을 쌓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이 때론 대법원이 심리하는 사안과 이해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

2020 대선 직후 몇 주에 걸쳐 지니 토머스는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었던 마크 메도스에게 “역사상 최대 강도짓”을 막아야 한다는 일련의 긴급 메시지를 발송했다. 이 중에는 “(트럼프가 계속 백악관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는 언급이 나온다. 그녀는 평소 자신의 남편을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칭한다. 지니 토머스가 메도스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시드니 파월을 트럼프 변호팀의 “선봉이자 얼굴”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현재 파월은 1/6 의사당 난입사건과 관련해 트럼프의 공범으로 기소된 상태이며 검찰측과의 형량거래에 따라 조지아주 불법 선거개입 혐의에 유죄를 시인했다.

지니 토머스는 위스콘신과 애리조나 주 의원들을 상대로 바이든의 승리를 뒤집고 친 트럼프 지지자들로 대통령선거인단 명부를 재작성하기 위한 로비를 펼쳤다. 2020년 11월 9일, 그녀는 주 의원들에게 “언론의 압박과 정치적인 압력에 굳건히 맞서야 한다”며 “우리의 헌법이 당신들에게 부여한 막강한 권한에 따라 깨끗한 선거인단을 선택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야한다”고 촉구했다.

지니 토머스는 변호사이자 한때 클래런스 토머스의 서기로 활동했던 존 이스트맨과도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이스트맨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바이든의 대선승리 인증을 막을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 인물로 트럼프의 연방선거 개입의혹에 연루됐지만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지니 토머스는 2021년 1월 6일 백악관 앞에서 열린 트럼프의 “도둑질을 멈추라” 집회에도 직접 참가했다.

이쯤에서 연방 대법원이 심리하기로 결정할 예정인 의사당 난입관련 6개 케이스를 살펴보자. 대법원은 잭 스미스 특별검사로부터 대통령의 정치 행위가 절대적 면책특권의 대상인지 아닌지를 신속히 심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에 앞서 연방 대법원은 의회의 대선결과 승인절차 방해를 금지한 연방법의 위헌여부를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14차 연방수정헌법 3항에 따라 트럼프의 대선 후보출마 자격을 박탈한 콜로라도 주 대법원 판결도 트럼프 법률 팀에 의해 연방 대법원에 상고될 예정이다.


물론 배우자의 정치활동을 다른 한쪽의 배우자와 자동적으로 연결지어선 안 된다. 지니 토머스는 워싱턴 프리 비콘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많은 기혼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동일한 이상과 원칙, 그리고 미국을 위한 열망을 공유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각자의 독자적인 경력과 아이디어 및 의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클래런스는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나와 상의하지 않으며 나 역시 내 일에 그를 끌어들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바이든의 취임을 막기 위해 지니 토머스가 벌인 치열하고도 전방위적인 싸움은 클래런스 토머스의 기피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기준을 중족시킨다. 또한 그녀가 선거결과를 뒤집으려는 시도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인 토머스 클래런스가 이같은 시도와 관련된 케이스를 심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법관 기피 규정은 심각한 ‘편향성 시비’보다는 금전적 이해충돌처럼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를 다루는데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소송에 휘말린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대법관은 문제의 기업 관련 재판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는 회피 결정을 내려야 마땅하다. 판사의 배우자가 피고나 원고의 법정대리인을 맡은 법률회사의 파트너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설적으로 잠재적 이해충돌에 따른 결과가 심각할수록 판사의 회피 기준은 더욱 유연해진다. 새로운 행동강령이 대법관의 특정 사안 심리 자격여부를 외부기관이나 외부인이 아닌 대법관 각자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토머스의 표가 14차 수정헌법 3항에 근거한 대통령 면책특권 소송의 향방을 가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거의 틀림없이 토머스가 자발적 회피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단언하기엔 이르다. 지난 10월 이스트맨이 조지아주 법원의 판결을 연방대법원에 상고하자 토머스는 아무런 설명없이 상고심 승인 여부를 가리는 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새로운 연방대법관 윤리규정에 따르면 대법관의 자진 기피는 대법원이 아닌 대법관 개개인의 결정에 달려 있다. 결국 토머스가 자신의 판관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차대한 시기에 그가 스스로 옆으로 비켜서지 않는다면 사법부 전체의 평판이 오물을 뒤집어 쓸 것이다.

▲알림: 지난 주 특별칼럼(‘이민자는 독이 아닌 생명의 피’)에서 필자 마크 시쎈의 얼굴사진이 루스 마커스의 것으로 잘못 게재되었습니다.

<루스 마커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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