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걸음마다 용의 전설…눈길 돌리면 쪽빛 바다

2024-01-12 (금) 삼척=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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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린만큼 보이는 풍경 - 삼척 초곡항에서 임원항까지

삼척시 남쪽 해안에는 용의 전설을 품은 해변이 여럿 있다. 옛이야기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거나 근거가 모호하면 더더욱 난감하다. 결국 빈자리는 재담 넘치는 이야기꾼만큼이나 풍부한 상상력으로 채워야 한다. 초곡용굴촛대바위, 해신당공원, 수로부인헌화공원은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와 신라시대 향가에 언급된 이야기를 모태로 꾸민 공원이다. 옛이야기에는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소망과 이상이 투영돼 있다. 무엇보다 시리고 푸른 동해 바다 전망이 끝내주는 곳이다.

■반투명 에메랄드, 물빛 고운 초곡과 장호 바다

동해안에 푸르고 시린 물빛을 자랑하는 겨울 바다가 어디 한두 곳일까. 그중에서도 갑진년 첫 여행지로 삼척 해변을 추천하는 이유는 용의 전설을 품은 해변이 유난히 몰려 있기 때문이다. 용처럼 비상하리라는 거창한 포부도 좋지만, 소박한 일상의 소망을 다짐하는 곳으로 손색없는 곳이다.


삼척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20㎞ 떨어진 근덕면 끄트머리에 초곡항이라는 조그마한 포구가 있다. 몇 해 전 해안가 바위 절벽을 따라 산책로가 놓이며 관광객의 발길이 꾸준한 곳이다. 해상 산책로의 정식 명칭은 초곡용굴촛대바위길, 지명과 지형, 마을의 전설까지 두루 담아 이름이 길어졌다. 외지인에게 구체적으로 알리려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해안 절벽을 따라 연결된 탐방로는 전체 660m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럼에도 갯바위와 어우러진 바다 풍광은 옹골차다. 입구에서 몇 발짝만 내디디면 절벽에서 살짝 떨어진 작은 바위 봉우리로 산책로가 연결되고 조금 더 가면 용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길은 짧은 출렁다리를 거쳐 수면에서 우뚝 솟은 촛대바위까지 이어진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푸른 물결이 갯바위에 부딪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촛대바위와 절벽 사이에 담긴 바닷물은 유난히 맑고 투명하다. 탐방로 전체가 바다 전망대이자 지질 박물관이다.

태풍 피해 복구공사로 길은 중간쯤에서 끊겨 전설의 용굴까지는 갈 수 없다. 용굴 전설은 소박한 어민의 꿈을 담고 있다. 가난한 어부가 백발노인이 꿈에서 일러준 대로 바다 한가운데서 죽은 구렁이를 제사 지내 주려고 해안 절벽으로 끌고 왔는데, 되살아난 구렁이가 굴속으로 들어가 용이 되어 승천했다는 내용이다. 결말은 예상대로다. 그 후부터 어부는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만선을 이뤄 부자가 됐다고 한다. 실제 용굴은 배 한 척 들어갈 만큼 제법 큰 규모이고, 주변에 흩어진 갯바위가 절경을 빚어 주민들은 일대를 ‘해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초곡항에서 언덕을 하나 넘으면 용화해변이다. ‘용화’라는 지명 역시 용굴에서 비롯됐다. 약 1km에 이르는 한적한 백사장으로 초록 바닷물이 끊임없이 밀려든다. 여행객의 발길이 뜸한 겨울 해변에 갈매기가 무리 지어 볕을 쬐고 있다. 용화해변 남쪽 언덕을 넘으면 장호해변이다.

그 곡선의 해변 상공으로 케이블카가 가로지른다. 삼척해상케이블카(성인 왕복 1만 원)는 수심이 얕아 반투명의 에메랄드빛을 가득 머금은 바다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설이다. 갯바위 사이 바다 색깔이 유난히 고운 장호항은 여름철 스노클링과 투명 카약을 즐기는 명소다. 장호항에서 다시 언덕 하나를 넘으면 갈남항, 역시 갯바위가 바다와 어우러진 소박하고 한적한 갯마을이다.

■다산과 풍요, 생명의 희망 품은 전설의 바다

갈남항에서 다시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약 3㎞ 내려가면 또 조그마한 포구 신남항에 닿는다. 마을 앞 해안의 절반은 포구, 절반은 모래사장이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해변이 손바닥만 한데, 의외로 지역의 숨겨진 일출 명소다. 아담한 모래사장 앞에 우뚝 선 바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렸고, 겨울철 떠오르는 태양이 그 옆구리에 걸린다. 주변에 흩어진 갯바위로 끊임없이 파도가 부서지고, 새벽 조업에 열심인 어선 주위로 갈매기가 날갯짓한다.


바닷가 조그만 당집, 해신당은 국내 성(性) 숭배 신앙을 대표하는 곳으로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과 음력 시월 오일(午日)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냈다. 동해안의 서낭당은 남신과 여신을 구분해 따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다를 관장하는 여신에게는 풍어를, 산을 주관하는 남신에게는 풍년을 기원한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바닷가 마을에선 당연히 남신보다 여신이 중시된다. 신남마을에도 뒤편 산기슭에 남신을 모신 ‘큰당’과 바닷가 언덕에 여신을 모신 ‘작은당(해신당)’이 있다. 멀찍이서 서로 마주 보는 모양새다.

표를 끊고 공원으로 들어서면 해신당에서 언덕으로 연결되는 숲길을 따라 온갖 모양의 남근 조각이 배열돼 있다. 노골적인 작품(?)이 많아 지면으로 보여주기 민망한데, 이 마을의 남근 숭배는 ‘애바위’ 전설과 관련이 깊다. 마을에 결혼을 약속한 처녀, 총각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처녀는 해초를 뜯기 위해 총각이 태워 주는 배를 타고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에 내렸다. 총각은 곧 데리러 오겠다 약속했지만 갑자기 들이친 파도와 폭풍우에 처녀는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처녀가 살기 위해 발버둥치던 바위를 주민들은 ‘애바위’라 불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부터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주민들은 시름에 빠졌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한 어부가 지금의 해신당 자리에 오줌을 누었더니 그때부터 만선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마을에선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향나무로 남근을 깎아 제사를 지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수로부인헌화공원

해신당에서 다시 10㎞를 내려오면 임원항 뒷산에 수로부인헌화공원이 있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헌화가’와 ‘해가’에 등장하는 수로부인 이야기를 토대로 꾸민 공원이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남편 순정공을 따라가다가 바닷가 절벽에 활짝 핀 철쭉에 반해 꺾어 달라고 부탁한다. 마침 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뜻을 받들며 읊은 노래가 4구체 향가 ‘헌화가’다.

부임 행차는 계속되고 둘째 날 임해정에서 점심을 먹는데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다로 끌고 들어간다. 이번에도 한 노인이 백성들을 모아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하고, 그의 말대로 했더니 수로부인이 용을 타고 바다에서 나왔다. 이때 백성들이 불렀다는 노래가 ‘해가’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 남의 아내 앗은 죄 그 얼마나 큰가 / 네 만약 어기고 바치지 않으면 / 그물로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수로를 구출한 원동력은 결국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모은 노인의 지혜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이다.

<삼척=글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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