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시골 할아버지 마을에 가보면 집집마다 조그만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다. 동네 안에는 가뭄을 대비해 마실 물을 위한 두어 개의 작두펌프가 놓여있었다. 작두펌프는 땅 속에 고여있는 웅덩이에 관을 내려 물을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도구이다. 지금은 상수도 시설이 다 되어있어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작두펌프와 관련된 마중물이란 단어는 흔히 쓰고 있다. 원래 지하수를 위로 올리기 위해 먼저 한 바가지 물을 작두펌프 속에 부어넣는 게 마중물이었다. 지금은 어떤 일을 시작하는 실마리나 계기를 의미하는 말로도 쓰인다.
감정노동이 심한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다보면 어느새 노인이 되어간다. 나이 들어 자극과 정보가 적어지면 세상사가 지루하고 무감동, 무기력, 무의욕 같은 부정적 사고와 감정이 쌓여만 간다. 노년의 삶은 보다 많은 자극과 정보를 얻기 위해 변화와 도전이 필요하다.
노년기는 생애주기 발달과정의 한 영역이다. 여러가지 상실에 대한 슬픔과 외로움에 신체적, 정신적 성장마저 멈추어가는 황혼의 세대다. 내적 외적 스트레스와 대항하여 싸워야할 항체(면역)의 힘도 약해진다. 주변 상황이나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면 정체성, 독립성이 무너져 자신의 존재이유에 회의를 품게 만든다. 하지만 노년이 꼭 죽음을 기다리는 시기만이 아닌 좋은 점도 꽤 있다. 꺼져가는 등잔불처럼 약해진 항체를 강하게 만들어 성장을 멈추지 않게 할 수도 있다.
뇌과학 또한 노화가 쇠퇴과정의 전부가 아닌 성장의 불씨를 살려내는 시기도 됨을 설명해준다. 고령이나 질병으로 뇌가 손상을 입더라도 뇌기능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일부 뇌세포를 따로 남겨두고 있다. 유사시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과 같다. 이를 의학용어로 뇌신경 가소성이라 부른다. 우리의 감정을 조절 통제하는 뇌의 두 영역이 있는데 하나는 뇌 깊숙한 곳의 편도체로 두려움, 공포, 충동감 등을 다룬다. 다른 하나는 이마 바로 뒤 눈전두엽 영역으로 두려움, 공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감정들을 처리한다. 그런데 노년기의 뇌는 젊은이의 뇌와 조금 달라 눈전두엽 뇌가 편도체보다 감정조절기능이 훨씬 세다. 결과 노인은 공포, 충동감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조절하여 세상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유연한 마음과 정신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더불어 회복 탄력성도 높여주어 삶의 의미와 목적에 맞는 삶의 방식을 창조할 수 있다. 즉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남은 인생항로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젊을 땐 대부분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가족과 사회가 원하고 인정하는 관계중심으로 산다. 항상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강박의식 속에 젖어있다. 노년을 맞으면 타인관계나 강박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을 믿고 인정하는 자기와의 관계설정을 해야 된다. 오래 사는 것보다 하루를 살아도 일상에 숨겨진 하고 싶은 일의 재미를 찾아야 한다.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줄 마중물이 필요하다.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가짐, 때로는 자신의 등을 두드려주며 칭찬해주고 위로하고 화해하는 평안함이 노인 삶의 마중물이 아닐까 싶다.
나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몸과 마음과 영혼이 건강한 노인으로 늙어야 된다. 성장을 멈추지 않고 여유와 유연성으로 공감능력을 키운 노인다운 모습을 보여야한다. 가능하면 얻은 지혜와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게 인생항로의 불빛을 비쳐줄 작은 등대역할도 하고 싶다. 마중물을 부어도 작동 안하는 고장 난 작두펌프 신세가 되지 않아야 한다. 고장 난 작두펌프는 평생 쌓아온 정체성, 독립성이 무너지는 치매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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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