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
2023-12-14 (목)
김능현 서울경제 논설위원
‘사쿠라’는 군부 정권 시절 집권 세력에 협력하는 야당 정치인을 비하할 때 자주 사용됐다. 흔히 ‘변절자’를 뜻한다. 연분홍색 말고기를 의미하는 ‘사쿠라니쿠’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연분홍색으로 봄을 물들이는 벚꽃의 일본 말인 사쿠라와 고기를 뜻하는 니쿠의 합성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고기가 부족했던 일본에서 말고기를 소고기로 속여 파는 일이 흔했는데, 소고기로 둔갑한 말고기를 사쿠라니쿠라고 불렀다고 한다. 겉으로는 야당이면서 실제로는 여당에 협조하는 정치인,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 등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1970년대 ‘중도통합론’을 주장한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명분보다 실리를 중시했던 유진산 전 신민당 총재 등은 ‘사쿠라’ 낙인으로 수모를 겪었다.
오늘날 사쿠라는 정적에 대한 저주의 언어로 자주 쓰인다. 특히 강성 우파나 강성 좌파 성향의 정치인들이 합리적 중도 또는 현실주의 노선을 걷는 정치인을 회색분자 또는 기회주의자로 폄하하며 사쿠라 딱지를 붙인다. 우리나라처럼 이념 성향이 좌우 극단으로 갈라진 사회에서 중도를 표방했다가 사쿠라라는 낙인이 찍히면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86세대 운동권 출신인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1일 신당 창당을 추진 중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를 겨냥해 ‘사쿠라’라고 부르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그는 “이낙연 신당론은 윤석열 검찰 독재의 공작 정치에 놀아나고 협력하는 사이비 야당, 즉 사쿠라 노선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들이 비명계 인사들을 겨냥해 ‘수박’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유사한 행태다. 김 의원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정몽준 후보의 신당에 전격 합류해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김 의원의 발언을 두고 ‘셀프 디스’ ‘내로남불’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지는 이유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정치인을 무조건 ‘사쿠라’ ‘수박’ 등으로 낙인찍는 것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구시대적 행태다.
<김능현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