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의 독재가 무서운가? 그렇다면 이 말을 명심하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독재자 트럼프’의 두려움 그 자체다.
이젠 더 이상 트럼프의 독재 가능성을 부정하기 힘들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그가 내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트럼프의 우군들은 그의 재집권에 대비해 미국을 독재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정교한 준비작업에 착수했고, 유력한 칼럼니스트들은 앞 다투어 이같은 시도의 ‘성공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그러나 주장은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미국의 제도와 시민문화는 트럼프의 전횡에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쇠퇴했고, 따라서 그가 재집권한다면 독재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대표적인 예다. 이같은 논리는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 분출한 건강한 시민정신을 설명하지 못한다. 불합리한 숙명론은 비생산적이다. 특히 트럼프가 독재자의 의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위중한 시점에 유권자들의 저항에너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현재 상황에서 극단적인 비관론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트럼프는 자유롭고 공정한 미국의 선거제도를 해치려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상태다. 그럼에도 트럼프와 그의 우군들은 재집권할 경우 법의 울타리를 짓밟을 충복들로 정부의 요직을 채우고, 정적들을 제거하며, 그에게 반대하는 ‘해충’같은 인물들을 ‘박멸’하겠다고 벼른다.
이런 상황이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음에도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을 위한 예비선거에서 독주를 거듭하고 있고, 바이든 대통령과의 가상대결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 대다수 유권자들은 마치 독재체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듯 보인다.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다. 여론조사 결과가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이같은 수치를 근거로 시민정신이 약해졌다거나 유권자들이 민주주의의 위기에 무심하다는 식의 성급한 결론을 내려선 안된다.
거의 매일 터져나온 트럼프의 ‘정치적 망동’에 가려 눈에 뜨이진 않았지만 그의 재임기에도 희망어린 조짐이 있었다. 2017년 트럼프가 무슬림 입국금지 명령을 내리자 시민들은 공항에 모여 이들을 지지하는 ‘깜짝 시위’를 벌였다. 사학자인 라라 푸트넘과 테다 스콕폴이 작성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로부터 1년 후, 평소 정치에 냉담했던 중년 여성들 사이에 조직적인 민주주의 수호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민주당은 2018년 중간선거에서 선전했다.
선거철인 2020년, 경찰의 과도한 무력사용에 항의하는 시위 도중 일부 폭력사태가 발생하자 트럼프는 즉각 시위자들을 폭도로 규정했지만 대다수의 유권자들은 이들의 가두시위를 평화롭고 정당한 정치활동으로 받아들였다. 이어 2022년에 치러진 중간선거에서는 공개적으로 대선결과를 부정한 공화당의 유력 후보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감이 유권자들의 표심을 움직인 동인이었다.
저평가되기는 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반민주적 행태에 대한 제도권의 반응은 놀랄 만큼 양호했다. 2020년 대선 패배를 뒤집으려는 트럼프의 시도는 법원에서 장벽에 부딪혔고, 의회는 선거인단 투표 시스템 조작을 방지하기 위한 관련법 개정안을 초당적으로 승인했다.
또한 2021년 1월6일의 의사당 유혈 난입사태로 이어진 트럼프의 쿠데타 선동은 민주당이 주도하는 연방하원 특별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이어 열린 청문회는 최소한 한 세대만에 입법부가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은 이례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선거관리 관계자들과 공화당 주 의원들 및 트럼프의 전 보좌관들은 청문회에서 비상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증언을 했고, 이들의 증언은 2022년 선거에서 트럼프 지지후보들이 표의 심판을 받는데 기여했다.
물론 트럼프가 차기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자멜 보위가 지적했듯 불합리한 선거인단 제도와 연방 대법원의 투표권 제한판결이 MAGA 집단처럼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소수파에 속한 유권자들이 수적 열세를 딛고 트럼프를 다시 권좌에 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측근의 선거뒤집기 시도에 반발했던 관리들을 숙청하기 위한 대대적인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잇따른 언론 보도 역시 표적이 된 관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법적제한은 물론 사법부의 판결까지 무시하는 트럼프와 그의 조력자들이 재집권할 경우 그들의 정치보복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관건은 트럼프와 그의 쿠데타 시도를 도운 조력자들의 사법처리다. 이들을 사법처리하는데 실패한다면 자신의 심복으로 물갈이한 연방 법무부의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집권 2기의 불법적인 아젠다를 집행할 것이라는 그의 협박은 실행에 옮겨질 것이고 이를 막으려는 노력은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트럼프를 기소하는 과정에서 검찰은 예상치 못한 강인한 결기를 보여주었다. 그들의 실패를 섣불리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비관적인 경고가 난무하는 이유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유권자들의 안일한 심리상테를 부수기 위해서일 터이다. 그러나 독재자들의 집권 행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루스 벤-지아트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경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독재자들은 그들의 승리가 ‘시대적 필연’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유권자들을 설득했고, 이같은 전술은 늘 효력을 발휘했다.
벤-지아트는 필자와 마주한 자리에서 “독재자는 그 무엇도 자신을 멈춰 세우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연출한다”며 “독재자 본인이 창조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휘광은 그를 실제보다 강력한 지도자처럼 보이게 만들면서 대중의 지지를 활성화한다”고 말했다. 대중의 인식조작이 이들이 지닌 수단의 전부인 셈이다. 결국 독재자들의 노림수는 유권자들이 그들의 숫자와 힘을 잊어버리도록 최면을 거는 것이다.
필자의 의도는 지금의 위중한 정치상황을 희석하려는게 아니다. 다만 심각한 우려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흘려보내고자 함이다. 정치학자인 브라이언 뷰틀러의 지적대로 불가피한 숙명론으로 꾸며진 트럼프 대세론은 그의 폭압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이 나올 때마다 민중의 절대다수가 공개적으로 반발했다는 사실을 덮어버리면서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에게 반트럼프 운동이 미약하다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운명론적인 악몽에 빠져 있어선 안된다. 우리에겐 방어태세를 갖춘 자경단의 신중한 자신감이 필요하다. 미국은 이미 한번 트럼프를 패퇴시켰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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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사전트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