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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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리티(civility)가 실종 될 때…

2023-12-04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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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어김없이 빨강색 구세군 자선냄비가 가두에 등장했다. 휘황찬란한 백화점 쇼 윈도우. 그리고 송년모임 초청장이 날라든다. 어느덧 세밑이다

한해를 돌아보며 마감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서울 발로 전해지는 뉴스들은 한 결 같이 그렇다. 여전히 열기(?)에, 적개심에, 혐오가 넘쳐난다. 살기등등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할 정도다.

‘41분 만에 검사 2명 날린 巨野, 앞으로 10명 더 탄핵’, ‘野 제2, 제3 이동관도 모두 탄핵 ...후임 방통위장도 찍어내기 예고’ 등등의 주요 신문 기사제목들에서 보듯이.


이 혐오의 정치 뒤로 들려오는 것은 입에 담지도 못할 수준의 쌍욕에, 막말들이다. 대통령부인을 ‘설쳐대는 암컷’으로 매도한다. 그에 질세라 함세웅이라는 명색이 가톨릭교회 사제는 ‘방울 달린 남자’ 타령을 해댔다. 그런가 하면 상대 당 의원들을 유인원 비슷한 무리라고 대놓고 조롱을 한다.

성찰의 언어는 찾아 볼 수 없다. 선거개입,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수수 등으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고위인사들이 무더기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형식적인 사과는 말할 것도 없고 유감표명조차 없다. 오히려 야당 탄압 프레임을 고집하면서 검찰을 비난하고 있다. 몰염치의 극치다.

막말에, 쌍욕에, 증오에, 독설과 저주의 언어로 점철된 정치판. 무엇을 말하나.

‘사상은 언어를 부패시키고 언어 또한 사상을 부패시킨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극도로 타락한 정치 언어, 이는 시민의식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폭언에, 막말과 쌍욕의 대잔치 와중에서 실종되는 것은 다름 아닌 시빌리티(civility)이다.

시빌리티란 단어를 영어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은 적절한 한국말을 찾기 어려워서다.

정중함, 예의바름 등으로 사전에는 번역돼 있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전해주지는 못한다. 이 말이 지닌 공동체적 측면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과 견해가 달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 즉 사회질서를 존중하는 문명화된 민주주의 사회의 공민(公民)에 걸 맞는 행동양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시빌리티란 단어다.


직접 투표제도가 실시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초석은 시빌리티에 있다. 공존, 절차적 정당성 존중과 함께 시빌리티는 자유민주주의의 3대 가치로 지목되고 있다. 이 시빌리티의 실종 상황에서는 민주주의도 가능하지 않다.

규칙을 정해 비폭력적 방식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단계. 한국의 경우 구한말부터 추구해왔으나 1987년까지 이루지 못했던 것이 바로 시빌리티다. 자유 민주주의의 초석이자 국격으로도 이해되는 게 시빌리티다.

그 시빌리티가 막말에 쌍욕 등 언어폭력 상황을 맞아, 실종, 아니 파괴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발단은 어디서 찾아지나.

‘포퓰리즘(Populism)으로 시작해 포퓰리즘으로 막을 내렸다’- 표퓰리즘이 트레이드마크인 문재인 정권에서 그 원죄는 찾아지는 것 같다. 표퓰리즘은 문재인 정권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시작돼 문재인 정부 들어와 완성됐다는 게 적지 않은 국내 정치학자들의 진단이다.

‘노무현 정부는 엘리트와 타협을 하다가 실패했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 386 주사파의 판단으로 그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듯 더 철저하게 포퓰리즘에 매달렸다. 소득주도성장, 북한 비핵화, 검찰개혁 등이 그 산물이다.

포퓰리즘은 대중과 엘리트를 대척점에 놓고 정치와 사회 체제의 변화를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것이 편 가르기다. 모든 것을 대립과 갈등이란 측면으로 몰아간다.

대화상대로서 정치적 경쟁자란 개념은 없다. 오직 척결의 대상일 뿐이다. 그게 문재인 정부 386세대 좌파의 멘탈리티다. 그런 그들의 언어구조는 독소를 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문빠’, ‘대깨문’이란 전대미문의 정치적 패거리다. 이 정치적 팬덤은 이재명의 출현과 함께 또 한 차례 악성 진화를 겪는다. ‘개딸 파시즘’이다.

선거는 그들에게 더 이상 옳고 그름을 따지고 국민의 판단을 구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들의 감정적 호오(好惡)를 배설하는 통로일 뿐이다. 기이한 현상은 배설수준의 험한 쌍욕을 하면 할수록 지지층은 더 결집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대한민국을 떠받들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리고 그 위기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온갖 부정부패로 사법리스크가 날로 커지고 있는 이재명이다.

그런 그가 검찰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리고는 잇단 탄핵에, 입법폭주에, 묻지마 식 독설에 쌍욕도 마다않고 있다. ‘개딸’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아가며. 그러나 이재명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다. 방탄이다. 어떤 수단을 강구하든 사법리스크를 뒤집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그의 어젠다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그 결과 ‘은밀한 파괴(subversion by stealth)’의 길에 접어들었다’- 국내의 한 논객, 그것도 진보논객의 진단이다.

달력에 눈이 간다. 두 주가 지나면 크리스마스다. 한 해가 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동시에 한 가지 상념이 스친다. 대한민국에게 2023년은 무슨 해로 기억될까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최악의 해, 아니면 깊은 밤도 지나 이제는 여명을 향해 나가는 그런 해…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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