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친구를 대학 때 잃었다. 지금은 최신 캠퍼스 건물들이 꽉 들어찼지만 재개발 전, 연대와 이대가 이어지는 후미진 뒷산에서 일어난 일이다. 마약 과다복용이었는데 호흡곤란을 일으킨 친구를 같이 있던 남학생이 들쳐 업고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뛰었다. 우리는 마른 덤불이 우거진 숲길을 헉헉 달려 내려가면서 계속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정신 차려! 숨 좀 쉬어봐!” 의식불명으로 응급실에 누운 친구 머리맡에서 바이탈 사인 모니터를 바라보던 밤은 내가 그때까지 경험한 가장 긴 시간 중 하나다.
기억이란 대개 지나간 경험을 떠올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겐 미래기억도 있다. 내일 제출해야 하는 서류, 다음 달에 있을 미팅, 앞날에 이루어야하는 일이 곧 미래기억이다. 평균적으로 과거기억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다. 친구의 병상을 지키던 그 날의 초침은 1초 길이보다 훨씬 더 천천히 움직였는데 나이든 지금, 미래를 떠올릴 때의 시침은 빨리도 흘러간다. 왜 시간의 길이는 제멋대로 달라지는 것일까? 곁에 없는 정든 임을 그리는 황진이의 동짓달 하룻밤은 길기도 길다가, 내일이면 헤어질 입영전야, 연인과 함께 지새는 밤은 속절없이 빠르다.
시간의 길이는 실제로 시계바늘이 똑딱거린 객관적 시간과 우리 마음이 느끼는 주관적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게 시간인지를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국내외 여러 ‘기다림’ 연구에서는 기다리는 이유와 목적을 알고 기다릴 때, 그리고 언젠가 이 기다림이 끝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할 때 객관적 시간보다 더 짧은 시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연구의 세계적 대가로 꼽히는 듀크대 워런 멕 교수도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 데는 신경생물학적, 심리적 요인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식당에서 배가 고프면 음식이 도착하는데 더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껴지고, 캠핑장에서 곰을 만난 등산객은 과도하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세상이 멈춘 듯 시간의 속도가 느려지는 경험을 한다. 마음은 생각보다 객관적이지 않다.
국내학자 이고은박사도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2019). 강의실이 있는 오르막길이 얼마나 멀고 가파른지 묻는 실험에서, 기쁘고 활기찬 기분의 학생들은 같은 길을 가뿐하게 여겼으나 이성친구와 헤어져 마음이 외롭고 힘든 학생들은 오르막길이 훨씬 더 가파른 것으로 느꼈다. 또한 연인과 헤어진 시기가 최근일수록 그 경사는 한층 더 가팔랐고 헤어진 시간이 오래일수록 완만한 것으로 느꼈다는 것.
자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들은 기억 창고에 저장된다. 그 기억 창고는 실제 흘러간 시간보다 경험 과정에서 일어난 감정과 주관적으로 느껴진 시간에 의지한다. 수만 년 인류가 적자생존 하느라 익혀온 적응 메커니즘이다.
연말엔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다양한 변수 때문이다. 같은 시간 내에 일어난 사건들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자주 일어났는지, 자신의 감정과 어떻게 관련된 일인지, 모두 다 잘 마친 일인지, 끝내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한 일인지 등이 우리에게 실제 시간과는 다른 기억을 하게 만든다.
연말엔 마무리 할 일들이 많다. 모임도 더 많아진다. 지나간 여름이나 가을이나 시간은 언제나 똑같은데 할 일이 많아지고 에피소드가 늘어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을 장기입원 환자들에게 시간이 길게 늘어진 느낌인 것과는 반대다. 제한된 시간 안에 촘촘히 정보가 압축 처리되면서 연말은 빨리 흘러간다. 기억창고 안에 반짝반짝 즐거운 에피소드가 가득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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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