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원이 책상 위에 두고 간 메모지에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미국인 정신과의사로 바꿔달라는 환자의 요구다. 태평양 건너와 처음 몇 년은 이런 말을 자주 들었지만 30년이 지나서까지 듣게 되니 마음이 착잡하다. 메모를 적은 환자의 이름을 보고난 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는 어린 딸을 가진 20대 중반의 백인미혼모다. 환자의 성장과정은 불행했다. 얼굴 보기 힘든 아버지, 남편에 대한 분풀이를 자식들한테 해대는 어머니, 그런 부모 밑에서 매일 긴장 속에서 지냈다. 환자는 커가면서 짜증이 심해지고 기분도 자주 변했다. 무슨 일이든 즉흥적으로 처리하여 꾸중도 많이 들었다.
여고시절엔 가족 몰래 술, 마리화나를 즐겼고,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음독자살을 기도했다. 믿었던 남자친구가 다른 여학생과 데이트하자 홧김에 타일레놀 거의 한 병을 삼켜버린 것이다. 병원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온 뒤부터 환자는 매사에 자신이 없고, 사람 믿는 게 어렵고, 우울한 날이 많아졌다. 남자들과 데이트할 때도 속마음이 아닌 겉으로만 좋은 척했으며 버림 받을까봐 섹스도 쉽게 했다. 그러나 교제는 번번이 오래 가지 못했다. 술, 마리화나 그리고 몇 번의 자살기도는 그녀를 더욱 괴로움과 외로움으로 몰아넣었다.
개인의 성격은 유전(기질)과 환경(성장배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 모두 독특한 유전자들의 배합을 가지고 세상에 나온다. “이 애는 태어날 때부터 까다로웠어.” 엄마들이 보통 하는 말이다. 이게 기질이다.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한 변하지 않는다. 환경요인도 중요하다. 특히 어린 시절 성장과정 중에 경험하는 마음의 상처가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성격은 보통 영아기와 유아기 때 큰 틀이 만들어지고 학령기,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보태고 빼면서 리셋되어 성인 초기가 되면 독특한 한 개인으로 굳어지고 만다.
앞에 언급한 환자는 경계성 성격장애 진단에 가깝다. 심리적 증상들이 너무 다양하여 진단이 애매하고 거의 모든 정신과 증상들을 나열해 놓은 백화점 같다. 불안정한 마음상태를 유발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은 정체성 문제다. 정체성은 생존을 위해 엄마나 엄마 대리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야하는 생후 1-3세에 발달이 시작된다. 개인의 성격을 규정하는 밑거름 중의 하나인 애착형성도 이때 엄마와의 연결고리에 의해 좌우된다. 엄마가 아이와 잘 웃어주고, 놀아주고, 어울려주는 포근한 신체적 접촉은 정상적 애착형성에 매우 필요하다.
한평생 살며 가장 먼저 경험하는 믿음이란 개념에 금이 가게 하는 것은 불안정 애착형성이다. 자기가 만난 정신과의사 중 베스트라고 추켜세우더니 무슨 영문인지 영어 못하는 외국서 온 의사로 평가 절하하는 앞의 환자의 태도가 그 예이다. 경계성 성격장애 환자는 세상사를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생각하지 못한다. 유연성이 결핍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는 이를 자아가 통합되지 않은 자아의 균열(Ego Split)이라 부른다.
자아의 균열은 인간의 감정, 사고, 행위, 관계 모두에 영향을 끼친다. 감정조절이 힘들어 기분이 들쑥날쑥하고, 마음이 공허하다. 누군가에 버림받을까봐 두렵고, 남을 믿지 않는 사고체제를 가진다.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이 약해 행동패턴이 충동적이라 자해, 자살시도가 많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힘들고, 이분법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세다.
치료는 매우 힘들다. 다양한 증상과 여러 정신질환들을 동반하고, 어른의 몸에 아이의 마음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증상은 약물로 완화해준다. 심리치료는 먼저 환자와 신뢰관계를 쌓고 일상에서 겪는 현실적 문제의 해결에 중점을 두는 지지치료를 먼저 한다. 그 후 인지치료와 분석치료를 통해 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적 요인인 금이 간 자아를 봉합하고 통합하여 불안정한 정체성을 바로 잡아주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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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