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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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2023-11-23 (목)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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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부담이다. 방계 가족까지 모이는 추수감사절 저녁식사에서 쏟아질 ‘K드라마 남자 주인공’에 대한 질문에 대비 중이다. 최근 게재된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기사를 읽으며 머릿 속에 달아보았던 스스로의 각주를 정리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 속 가부장적이고 가족주의적인 구조, 고부 갈등을 설명하는 건 익숙하다. 가족들의 식사 장면이 빠짐없이 등장해 자연스레 ‘반찬’ 종류로 이어지는 부분도 괜찮다. 단지 대화의 주제가 ‘남자 주인공’으로 옮겨가면 요즘 말로 대략난감이다.

르몽드지에 따르면 한국 드라마(K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들의 외모는 이렇다. “반짝이는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크고 검은 눈 위로 무심히 떨어진다. 피부는 매끈하며 완벽하게 재단된 정장에 몸매는 길쭉하다. 게다가 한국 드라마 속 젊은 남자들은 피부관리를 한다. 아침에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세련되고 로맨틱한 캐릭터들이 태도는 신중하고 다정하다. 자기 자신의 관리는 세심한데도 불쑥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익숙하지 않다. ‘왜 한국인가’의 저자 오펠리 쉬르쿠프가 표현한 대로 “한국 드라마에는 성관계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대신 감정이 깨어나는 여러 단계를 조심스럽고 에로틱한 방식으로 탐구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이런 부분이 프랑스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아이돌의 성공은 ‘미투’(me too) 운동으로 인해 남성성에 대한 숭배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 사회 내에서 새로운 남성성에 대한 욕구을 반영하고 있고, 할리웃에서 각광받던 강인하고 섹시한 스타일과는 다른 환상적인 남성상을 한국 드라마 남자 주인공들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르몽드는 분석했다.

드라마를 중심으로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의 문화에 몰입되어 있는 덕후들은 누구보다 언어 습득의 속도가 빠르다. 행복한 덕질(덕후의 취미생활)이 자연스럽게 학습으로 이어진다.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들을 자주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노출의 기회도 늘어난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를 보면서 빠져들고 유튜브를 통해 인터뷰를 보고 또 본다. 필요에 의한 학습이다. 미국 드라마(미드) ‘프렌즈’를 보면서 영어를 배웠다는 BTS 리더 RM의 학습법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영어공부법이다.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대상을 발견해 몰두하며 전문성을 쌓는 덕후는 자신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한다. 정보 교류를 하다보면 한국어에 능숙한 덕후들이 대화를 주도해나간다.

K팝 아이돌은 물론이고 K드라마에 몰입하는 글로벌 ‘덕후’들로 인해 한국어가 인기 있는 언어로 꼽히는 세상이다. 글로벌 언어 학습 앱인 듀오링고 조사 결과 한국어가 전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이 학습된 언어에 올랐다. 영어 이용자가 가장 많았고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 다음이 한국어였다. 학습자의 분포를 보면 브라질, 프랑스, 독일, 인도 및 멕시코에서 가장 빠르게 늘고 있다. 아이러니는 ‘덕후’가 일본어인 오타쿠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 ‘오덕후’의 줄임말이라는 것.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인데 본래 ‘집’이나 ‘댁’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이 의미가 확장되면서 초기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취미생활을 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하지만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현실이라기 보다는 허구가 만들어낸 K-콘텐츠의 힘이다. 아직까지는 넷플릭스 시리즈 ‘비프’ 속 한국 남자 주인공 대니가 주변에 많다.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쉽게 분노를 보이는 성난 사람들이다. 한국을 넘어 전 세계인들이 처한 현실이 넷플릭스 히트작 ‘오징어 게임’ 아닌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리얼리티 쇼 “오징어 게임: 더 챌린지”로 제작돼 추수감사절을 겨냥한다. 전 세계에서 모인 456명의 참가자가 456만 달러의 상금을 차지하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살벌한 게임에 도전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물론 탈락자가 드라마처럼 죽지는 않는다. 오징어 먹물이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출전자의 가슴을 물들이면 죽은 척 연기할 뿐이다.

1차 공개된 에피소드를 보니 영국 공군기지에 지었다는 세트장이 드라마를 완벽 구현했다. 참가자 대부분이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 출전한 영어권 출신인데 첫 게임에서 한국어로 나오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듣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모두가 한국어로 된 이 한 문장을 알아듣고 게임에 임하는데 ‘무궁화’가 지닌 진짜 의미는 알고 살아남으려 하는 건지. 올해 추수감사절 K-드라마 대화는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꽃이라는 화제로 시작해야겠다. 해피 땡스기빙!

<하은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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