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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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추억 여행

2023-10-28 (토)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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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집마다 있는 낡은 앨범을 같이 보다 보면 얼마 안가 지루해져 하품이 난다. 흥! 자기나 재미있지 촌스런 사진일 뿐인데!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와 친해지고 잘 보이고 싶으면, 사진을 같이 보며 백만번도 더 들은 지난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장단 맞춰 “어머나! 진짜야!” 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지갑은 열리고 무엇이든 내 것처럼 가질 것이다. 특히 나이 든 이에게 이거 맘에 든다며 나 줘요! 하면 이미 그건 당신 것이고, 다음에도 무엇인가 또 보이며 이것도 가질래?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보다 먼저 할머니가 된 친구들이 손주나 기르는 강아지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려면 내 돈 내고 보여 주는게 에티켓이라는데 공감한다. 내게는 소중하고 이쁘지만 다른 이에게는 귀찮을 때도 있고 남은 이에게는 결국엔 정리해야할 쓰레기가 되니, 나에게 아까울 때가 바로 다른 이에게 줄 때라는 것도 알아야한다.

무엇이든 두개 이상의 여유분이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탓에 비슷한 물건이 쌓이고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 집 냉동실은 터져나가려고 한다. 이토록 욕심이 많았던 삶에 대한 자세는 코비드19 전과 후로 바뀐 것 같다.


어느 날 아득히 땅속으로 꺼지듯이 숨 쉬기가 힘든 죽을 고비를 넘겨 다시 살아나니, 사람의 일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보다 욕심이 줄어든 것 같고, 화가 덜 나며, 웬만한 일은 그럴 수도 있다며 그럭저럭 넘어가고, 흰자만 보이게 흘기는 얄밉게 미운이도 별로 없고, 나이 든 이를 오랜만에 먼발치에서라도 다시 보면 반갑고 고마워진다. 그 대신 원래 많은 눈물이 더욱 많아져 이래도 찔찔, 저래도 훌쩍, 내 얘기에 내가 빠져 훌쩍인다.

때로는 철학자가 된 것처럼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라며 정리를 핑계로 이것저것 들어내어 안 쓰는 물건이나 없는 줄 알고 여러 개 사둔 건 바깥 잔디에 내놓으면 누군가 가져간다. 대충은 정리가 됐지만, 아직은 쌩쌩한 남편이 아끼는 낡은 LP 레코드판들은 그이랑 나랑 가고나면 누가 치워주나 하며 벌써부터 끌탕이다.

아직도 간직한 유치원 사진과 예전에 내게 준 엄마의 약혼기념 창경원에서의 흑백사진 속 아버지는 남동생과 똑같이 닮았고, 그 옆에 예전에도 귀엽고 통통했던 엄마처럼 똑같이 무릎 아프고 앞섶에 음식을 흘리는 내게 남편은 나이가 들수록 장모님이 언제 오셨냐며 놀려댄다.

몇 장의 흑백 사진은 그때의 추억이나 기억으로 인생을 살아가는데 여러가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때 크게 영향을 끼쳤다. 낡고 아련한 사진으로 남은 아버지가 꼬옥 안아주던 기억으로 남자는 다 내게 잘 해주는 줄 알았으니…. 그래도 내겐 아버지 대신 오빠같이 의젓하고 속 깊은 남동생과 지금껏 잘 지내고, 머나먼 미국에서도 함께 이민 와서 아들 딸 바르게 키워서 손자 손녀로 대가족을 이루며 늙어가는 나의 첫 남자여서 참으로 고맙다. 그래선지 왠지 남자가 더 좋았던 나는 여학교를 별 재미없이 다니고, 태어나고 자란 곳이 신촌이어서 당연히 대학은 집 근처 연대나 서강대를 가는 줄 알고, 이화여대는 남자가 없다고 핑핑거렸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내 실력으론 가까운 대학은 못가고, 그래도 남녀공학에서의 캠퍼스커플을 꿈꿨지만, 1차에 보기 좋게 떨어져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는 여자사범대를 그냥저냥 다니고 교사가 되고, 운 좋게도 마지막 남자인 남편을 만나고 40년 넘게 잘 지내고 있다.

예전에 누군가 그랬다. 자식이 없어 오만 것을 다하고 다니던 내게 넌 남편복과 돈복은 있다고 했는데, 대개는 이 나이의 할머니가 되면 남한테 빌리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융자 끝난 집과 차로 살아가는 나는 정말 부자인게 맞는지 알쏭달쏭하고, 소같이 일하고 고단함에 입 벌리고 자는 남편을 바라보며 남자복도 맞는건가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박명희 전 한국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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