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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2023-10-19 (목) 정혜진 서울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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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개념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가늠할 수 있는 미묘한 기교 또는 능력.’

위키피디아에 눈치(Nunchi)를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이다. 유튜브에는 ‘눈치를 키우는 법’ 등 콘텐츠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K문화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끌면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몇 가지 덕목이 높게 평가받게 된 결과다. 특히 K덕목 중 미국 문화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부분은 눈치로, 일부에서는 “한국인만의 슈퍼 파워”라며 이를 치켜세우기도 한다. 개인주의가 중심이 되는 미국 사회에서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변 상황에 맞춰 집단을 편안하게 하는 사회적 스킬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에 일조한 저서 ‘눈치의 힘: 한국의 행복과 성공의 비밀’을 쓴 한국계 미국인 저널리스트인 유니 홍은 눈치를 이렇게 설명했다. 눈치는 주어진 집단에서의 역학 관계에 민감한 이들이 보유한 특성으로 분별력에 기반한 소프트 스킬(대인 관계와 관련된 기술)이라는 것이다. 눈치가 빠를수록 사회적 환경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실제로 실리콘밸리 생태계에서도 눈치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한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는 “저마다 자신의 기여도를 주장하고 돋보이는 일들만 하기 바쁜 경우가 많은데 한국인 직원들은 공감 능력이 높아 주변을 살피며 자신의 기여도를 주장해 집단에 화합하는 분위기를 가져다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치는 엄연히 공감 능력과는 차이가 있다. 성향·성품으로 여겨지는 공감 능력과 달리 눈치는 의지의 영역에 가깝다. 이 때문에 종종 우리는 눈치에 따라 행동을 교정하거나 내 의사에 반대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월터 아이작슨이 지난달 출간한 전기 ‘일론 머스크’를 읽으며 놀란 부분이 있다. 어린 시절의 머스크를 표현한다면 ‘눈치 없는 아이’로 갈음할 수 있을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던 때는 또래 사이에서의 역학 관계를 따라가지 못하고 공감 능력도 없어 또래 서열에서 최하위가 됐다. 리더십도 없었다.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에게 맞기 십상이었다. 머스크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휘어진 코 역시 그 시절 괴롭힘의 상흔이다. 하지만 머스크는 자신의 환경을 바꿨다. 스무 살이 되어 어머니의 고향인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눈치 없음에 가려져있던 다른 능력들이 높게 평가받기 시작한다. 기발한 아이디어, 해박한 지식, 강인한 의지 등을 높게 평가한 이들이 머스크의 크고 작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기꺼이 그의 도전을 함께했다.

만약 머스크가 남아공에서 계속 자랐다면 어땠을까. 혹은 한국에서 자랐으면 어땠을까. 그의 수많은 ‘미친 소리’들은 애초에 투자자들에게 전해질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눈치에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하나 단점이 있다. 다른 사람과 다른 답안을 낼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도록 자기 검열 기제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답을 내려고 한다면 진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머스크는 20대 초반에 인류에게 진정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답을 내렸다. 인터넷, 지속 가능한 에너지, 우주여행 세 가지였다. 이 세 가지에 30년 넘게 투신하면서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만약 화성으로 이주하겠다는 계획이 너무 뜬금없어서 말을 꺼내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스페이스X는 없었을 것이고 전기차 시대 역시 한참은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전기 속 주변인들은 머스크를 처음 봤을 때 대부분 그를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 다만 타인의 의견이 어떻든 굴하지 않고 자신의 비전을 실행하는 의지에서 감동을 받았다. 모두가 편안함을 느낀다면 오히려 그 아이디어가 이상하지 않은지를 생각해봐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치가 성공 방정식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검열과 눈치를 분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정혜진 서울경제 실리콘밸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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