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부츠의 몰락
2023-06-26 (월)
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
장마 시즌이 다가오면 뜨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가 장화다. 장화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19세기 중반 고무 원료를 높은 온도로 가열한 후 유황을 첨가해 단단하게 만드는 기술이 개발됐다. 미국인 기업가 헨리 리 노리스가 관련 특허를 사들였다. 비가 자주 내리는 영국에서 이 기술로 비와 진흙으로부터 발을 보호하는 신발을 만들면 큰돈을 벌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노리스는 이를 위해 1856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노스브리티시러버(North British Rubber Company)’라는 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가 ‘레인 부츠의 대명사’로 불리는 장화를 생산하는 영국 ‘헌터부츠(Hunter Boot Limited)’사의 기원이다.
이 회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영국 군대가 약 118만 켤레의 부츠를 구매했기 때문이다. 전투가 혹독한 진흙 속에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아 장화가 전투력 향상에 큰 도움을 줬다. 회사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현재 회사명인 헌터부츠는 2006년께부터 사용됐다. 영국 왕실에서 인증하는 최고 권위의 ‘로열 워런트’ 마크도 받아 왕실에 납품해왔다. 2000년대에 세계적인 모델 케이트 모스 등이 착용한 장화 사진이 널리 퍼지면서 패션 브랜드로 더욱 유명해졌다. 2010년 이후 한국에 수입돼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회사의 2021년 매출액은 1억750만 파운드(약 1,773억 원)였다.
‘영국의 아이콘’이었던 이 회사가 20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코로나19·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Brexit)·인플레이션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회사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지난해 주요 시장인 미국에서 ‘따뜻하고 건조한 겨울’이라는 이상기온이 나타나 수요가 급감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고 한다. 160여 년의 전통 기업도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언제든 도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은 시장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끊임없이 혁신해야 생존할 수 있다. 정부는 생사를 다투는 기업이 신나게 뛸 수 있도록 규제를 걷어내고 투자 환경을 개선해줘야 한다.
<오현환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