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6.25를 생각한다. 폭력과 무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제하려는 행위에서 피가 튀고 죽음이 즐비한 전쟁, 6.25 당시 태어나지 않았으니 경험한 적도, 전쟁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60년대 전쟁에의 후유증으로 끼니를 잇기 어려웠던 생활상은 언뜻 기억난다. 미국 구호물자인 깡통 분유와 밀가루를 나눠주는 부산진역 앞 배급소에 장사진을 친 사람들, 새치기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서로 밀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있던 사람들, 그때 우리 집 식탁에도 수시로 수제비가 올랐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국어시간에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만났다.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 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아무 말 아무 움직임 없이/ 하늘을 향해 눈을 감은 국군을 본다/ 누런 유니폼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이하 생략)”
이 시를 처음 대하고 순국이란, 희생이란, 죽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충격이 왔다. 시인이 1950년 8월, 경기도 광주 산골에서 숨어 지내다가 문득 마주친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 소위의 시신을 보고 썼다고 한다.
이 군인에게도 정이 넘치는 가족과 사랑하는 소녀가 있었고 가까운 친구, 이웃과 평범하게 살며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손주들의 재롱을 보며 늙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간다.
한국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1950년 6월25일부터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27일까지 UN참전군이 178만9,000명, 이 중 유엔군 사망자 3만7,902명 중 미군 3만3,686명이 전사했다.
미국에 와서 살며 여행할 때마다 수많은 곳에서 6.25참전 기념비를 만나게 된다. 한인 방문자라면 포토맥강 건너 버지니아주 앨링턴 국립묘지와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전사자 추모의 벽, 판초를 입은 미군 조형물 등을 유의깊게 보게 된다.
버지니아 루레이 동굴 안에 1980년대 초에 설치된 참전기념판에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이 지역 출신 젊은이 23명의 이름이 기록되어있다. 이 지역 페이지카운티 인구가 2만4,000여 명, 이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 뛰어놀다가 처음 듣고 가본 나라인 한국에서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바친 청년들이다.
미국 최고 명문인 하버드대학의 강당 입구에 한국전 참전 전사자 18명의 졸업생 이름이 새겨져 있고 예일대학 안에도 학생들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빌딩 로비 벽과 기둥에 졸업생의 이름과 전사한 장소가 새겨져있다. 장진동 전투, 청천강 일대, 강원도 소양강, 낙동강, 인천 상륙작전 월미도 등등 우리에게는 낯익은 지명이, 이들에게는 생소한 이곳이 자신이 죽을 자리가 될 줄 살아생전 짐작이나 했을까.
미 전역에만 보훈처에서 관리하는 국립묘지가 135개, 참전기념비가 150개 정도라는데 거의 모든 곳에 6.25 관련 기념물이 있다. 스태튼 아일랜드의 코리안워베테란스파크웨이, 뉴저지 코리안워메모리얼하이웨이 등 차를 타고 가다가 코리안이 들어간 도로명을 보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이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은 70년째 휴전일 뿐 아직 전쟁 중이다. 그동안 남과 북 지도자가 만나기도 했지만 영원한 평화는 요원하다. 전쟁의 얼굴은 여전히 잔인하고 몰인정하며 차갑기 짝이 없다.
이미 오래전에 한 줌 흙이 된 이들 영혼이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사람의 욕심이 존재하는 한 인류 역사에서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인데 이념과 사상, 종교와의 갈등, 피 튀기는 싸움이 무슨 소용이랴 싶다. 묘지 참배를 다녀올 때면, 모두가 함께 사는 평화의 길을 상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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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