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안영일(1934-2020) 유작전 ‘물의 추억’(Memories of Water)이 웨스트LA의 ‘하퍼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물과 빛의 유희를 특유의 팔레트나이프 기법으로 캔버스에 가득 담은 ‘물’ 그림들이 오랜만에 화사하게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돌아가신지 2년반, 2017년 LA카운티미술관(LACMA)과 롱비치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진지 5년만이다.
이번 LA 쇼는 전시장 디스플레이가 특별히 아름답다. 벽 하나에 그림 하나! 작품 크기에 상관없이 한 공간에 하나씩 걸어 시선과 마음을 오로지 한 곳에 모은다. 특히 갤러리 초입 양쪽에 걸린 두 점의 1988년 대작(Water RAW, 68x120 inch)은 흰 공간을 배경으로 섬세한 파스텔 색채와 터치가 오롯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2020년 12월 타계 후 고 안영일의 작품들은 시카고와 뉴욕에서 잇달아 소개되며 주류화단의 주목과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21년 뉴욕 하퍼스 갤러리(Harper‘s Gallery)에서 열린 ‘20년 후’(20 Years After)는 작가의 ‘메모리얼’ 연작이 세상에 최초로 소개된 특별한 전시였다.
‘메모리얼’ 연작은 9.11의 상흔이 캔버스에 생생하게 새겨진 걸작들로, 그 격한 이미지가 가슴을 뒤흔드는 강렬한 작품들이다. 아내 소라야 안(황영애) 여사에 따르면 2001년 테러가 났을 때 작가는 며칠 동안 말없이 앉아서 TV화면에 계속 나오는 쌍둥이빌딩이 무너지는 모습과 잔해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약 20점의 연작이 탄생했다. 떨어지는 파편과 잔해와 잿더미의 아비규환을 흑백의 거친 스트록으로 기록한 작품들이다. 작가 생전에 한 번도 전시된 적이 없는 이 작품들은 테러 20주년을 맞아 뉴욕 현지에서 선보이면서 큰 화제를 모았고, 브롱스 뮤지엄과 마이애미 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성과를 거뒀다.
하퍼스 갤러리는 그 이듬해에도 뉴욕 첼시의 2개 전시장에서 ‘물’ 시리즈와 ‘캘리포니아’ 시리즈를 동시에 선보이는 대형 기획전을 열어 미 동부 화단에 안영일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타계 후 한국에서도 안 화백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전시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2021년 작가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주의 문화재단은 부자(父子) 화가인 안승각·안영일의 예술과 삶을 기리는 ‘거장의 귀환’ 전시를 열고 충북 근현대미술의 선구자로서 두 사람이 미친 지대한 영향과 업적을 기렸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안영일의 아버지 안승각(1908-1995)은 대한민국 1세대 서양화가였다. 동경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43년 청주상업학교 미술선생으로 부임한 안승각은 이후 청주사범학교에서 정창섭, 윤형근, 박노수 등 훗날 쟁쟁한 화가로 이름을 날린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1962년 청주사범학교가 교육대학으로 개편되면서 정교수가 되었고, 충북미술협회를 창립해 10여 년간 회장을 맡아 헌신했다. 구상과 비구상 작품을 그리며 10여 차례 개인전을 가졌던 아버지에 대해 안영일은 자서전 ‘오늘도 그림이 내게로 온다’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젊은 시절 나는 혼자 잘났다고 뻐기며 미술에 관해서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또 일찍 미국으로 건너오고 난 후에는 내 활동에 바빠 아버지가 어떤 분이었는지, 어떤 화가였는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아버지가 생전에 청주 지역신문에 18회나 연재했던 글을 읽어보면서 당시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화가이며 교육자로서 아버지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충북도는 ‘거장의 전시’ 이후 크게 고무돼 충북 미술교육의 선구자인 아버지와 해외에서 명성을 떨친 아들 천재화가를 연계시킨 전시를 계속 열고 있다. 2022년 10월 충북 대표작가 소장전 ‘세대공감’, 2023년 3월 소장전 ‘방향감각’의 주인공도 안승각 안영일이었으며, 바로 내달 5월10~28일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여는 ‘충북근현대미술의 시원’ 역시 두 사람을 중심으로 8명을 소개하는 전시다.
작가가 소천하면 대개는 작품도 잊혀진다. 수없이 많은 작가들이 수없이 많은 작품을 쏟아내는 세상에서 사라진 작가를 기억하고 조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화가 안영일이 잊히지 않도록 계속 수고하고 노력한 아내 소라야의 공로는 독보적이다.
생전 안영일 화백은 몹시 폐쇄적인 분이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아주 소수의 사람만을 자신의 세계에 들여놓았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화가로 칭송받는 삶을 살아온 탓인지 자기가 최고인 독불장군이었고 다른 화가들과 교류도 없었으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반면 활달하고 사람 좋아하고 누구나와 금방 친구가 되는 안 여사는 이제야 자유롭게 남편을 알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행콕팍의 자택을 사설미술관처럼 꾸며놓고 주변 친지들에게 개방하여 안영일의 아름다운 유산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서울대 미대 후배들을 비롯해 ‘코리안 아메리칸 뮤즈’(KAM) 등 예술을 사랑하는 크고 작은 모임과 그룹들이 끊임없이 방문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가까이서 보게 됐다며 감탄과 감사를 전하고 있다.
오프닝 날 하퍼스 LA 갤러리에 걸린 그림들을 보면서 2년반 전 떠나신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다.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보내던 동안에도, 생애 마지막 5년 쏟아지는 관심과 찬사 속에서도, 늘 말없이 앉아계셨다. 작품만이 그의 마음과 영혼을 대변한다는 듯, 한 손에 팔레트나이프를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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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