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두 노인’은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러시아에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평생의 소원으로 꼽으며 사는 두 농부가 있었다. 예핌은 부자이면서 술 담배를 철저히 금했을 뿐만 아니라 남의 흉을 보거나 나쁜 욕설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는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반면 그의 친구 예리세이는 평범한 농부였고, 가끔은 보드카를 마시며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고, 끊어야지 하면서도 코담배의 유혹을 받는 우유부단한 신앙인이었다.
가족이 미덥지 못해 쉽게 순례길을 오르지 못하는 예핌을 향해 예리세이는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지. 집안 일보다 영혼을 살피는 것이 더 급하지 않겠나.” 마침내 용기를 낸 두 노인은 각자 100루블씩 여행 경비를 마련하여 꿈에 그리던 성지순례 길에 오르게 됐다.
순례 길 중도에 이를 때쯤 예핌은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하여 씩씩하게 치고 나갔지만 예리세이는 몹시 지치고 지참했던 물마저 떨어지자 길가 작은 농가에 들러 물을 청하며 잠시 쉬어가려 했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는 물과 양식은 고사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농부의 가족들이 있었다. 의식은 있지만 거동할 수 없는 늙은 노파,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어 신음하는 아들, 악취가 진동한 채 죽어가는 그의 아내, 그리고 피골이 상접한 채 먹을 것을 달라며 부르짖는 어린 두 남매의 처철한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예리세이는 나흘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던 농부의 식구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기 시작했다. 벽난로에 불을 지펴 실내를 따뜻하게 덥혔고, 물을 길어와 먹이고 씻겼다. 빵을 적셔 조금씩 공급하자 가족들이 기적적으로 소생하기 시작했다. 기력을 회복한 남자가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흉년이 계속되자 농사는 망쳤고, 농토와 농기구까지 저당잡혀 먹을 것을 구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확산되면서 식구 모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었다고.
예리세이는 농부의 가족을 위해 저당 잡혔던 농토를 찾아줬고, 말과 수레와 파종할 씨앗들을 사서 농사를 짓게 했다. 당장 먹을 음식들과 젖소를 구입해 주고나자 노잣돈은 불과 17루블 밖에 남지 않았다. 예핌을 따라 잡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행경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예리세이는 성지순례 꿈을 접고 귀향했다.
반면 예핌은 성공적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6주 동안 머물며 예수님 탄생하신 곳, 제자들과 동행하셨던 곳, 짧은 공생애 마지막 오르셨던 갈보리 십자가의 길,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곳 모든 성지를 탐방하며 순례의 여정을 마쳤다.
예핌이 고향에서 다시 만난 예리세이에게 전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돌아오던 길에 자네가 머물렀던 집에 나도 들렀었네,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가족들로부터 자네의 선행에 대해, 자네가 순례여정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헌신적인 섬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네. 자네의 몸은 비록 예루살렘에 못 갔을지 모르지만, 자네 영혼은 분명히 예루살렘까지 다녀왔더군.”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이 짧은 한 구절에 기독교의 영성이 담겨있다고 톨스토이는 강조했다.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도 의미 있지만 예수님의 뜻을 좇아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한 예리세이의 신앙이 더 소중하다. 불쌍한 이웃에게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나눌 줄 아는 선한 사마리안 같은 사랑실천이, 형식적으로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성지순례보다 더욱 의미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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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선 굿스푼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