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을 잃어버린 사람이라 할까요?” 어떻게 오셨냐는 의사의 물음에 농담조로 답한 50대 중년 남자였다. 직장과 사회, 가정에서도 존경받는 사람인데 자기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슨 일을 해도 즐겁지 않고, 작은 실수에도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한숨이 나온다. 직장일이 끝나면 바로 집에 돌아와 카우치에 누워 TV만 보았다. 자신이 가족에 짐이 될 듯 싶어 어디론가 없어질까 하는 생각도 했다. 중년 위기를 잘 견디지 못해 임상적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사람은 왜 웃어야 하나에 대한 학설은 여러 가지다. 내면에 쌓인 스트레스, 갈등, 분노 등을 날려버리는 수단이라는 심리적 견해. 이빨을 드러내어 자신을 보호하고 공격하는 얼굴 모습이 변해 웃음이 되었다는 인류학자의 설명. 사회학적으로는 여러 사람과 어울려야하는 사회성을 높이기 위한 위장, 생물학적으로는 엔돌핀을 분비하여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라 한다. 이 모두는 개체의 생존을 위한 행위라는 진화론적 주장에 모두 포함된다.
의과대학 30주년 졸업기념 여행 중에 찍은 사진 한 장을 아내가 밀어놓는다. 도쿄 외곽의 어느 온천장에서 일본 전통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내 모습이 담겨있다. 그리고는 최근에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웃음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늙은 나이에 웃을 일이 별로 없지” 하는 말에 자식들 다 키워 내보내고 손주들 있으면 그게 웃을 일이지 무엇이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었다. 경쟁과 비교에 젖은 세상 속을 헤쳐가다 보니 얼굴이 굳어져 웃음이 없어진 것 같다.
웃음도 사이클이 있다. 어렸을 땐 바람만 스쳐도 웃음이 나온다. 청년기, 중년기를 거치며 책임과 의무를 등에 지고 살다보면 웃음은 사라져 간다. 그러다 아주 늙어버리면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 무슨 일에나 허, 허 웃어버리기 쉽다. 난 지금 잘 웃지 않는다니 아직 확 늙은 건 아니다 싶어 위안이 되지만 이제부터라도 더 웃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웃어야 면역세포의 힘을 세게 만들어 심장병, 뇌졸중, 암, 치매, 우울증 예방 효과가 있다.
웃음은 입과 눈의 여러 근육들을 사용한다. 입 웃음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입 근육들을 사용하여 사회적 분위기에 맞추는 이기적 웃음, 눈웃음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눈 주위 근육들이 작용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챙기는 이타심의 웃음이라 한다.
LA에서 차로 3시간 여 가면 조슈아 나무 국립공원이 있다. 모하비 사막과 콜로라도 사막을 포함한 아주 큰 공원이다. 그 곳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바위들과 선인장들, 한국의 소나무처럼 뒤틀리고 단검의 끝처럼 뾰죽뾰죽한 잎을 가진 조슈아 나무들이 널려있다.
공원의 울퉁불퉁한 사막 길을 걸으며 수 없이 많은 바위들을 보았다. 해골 바위, 아치 바위, 캡 바위 등. 하지만 나는 두개의 바위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하나는 웃음을 잃어버렸다던 앞 환자가 생각나서 활짝 웃는 바위, 또 하나는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순수하고 겸손한 위인의 얼굴을 닮은 바위였다. 애석하게도 그런 바위들을 찾지 못했다. 분명히 있을 법 한데 거친 세상 살며 메말라진 내 마음가짐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상태가 생명이 있는 상태, 즉 죽음의 본능이 삶의 본능보다 우세하다고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반면 20세기 초 여자 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은 창조와 사랑이 죽음을 극복한다는 반대이론을 폈다. 어떻든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갈등상태로 남아있는 듯싶다. 웃음을 잃어버리고 자살충동에 휘말린 우울증 환자를 지금 진료한다면 조슈아 국립공원 방문을 적극 권하고 싶다. 그가 활짝 미소 짓는 바위를 찾게 되면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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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