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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여생의 유토피아

2023-01-21 (토) 이형국 정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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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따뜻한 이불과 같은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이다. 그곳은 어린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보물 창고로 따뜻함·편안함· 행복감으로 가득 차있다.
내 고향은 푸른 바다와 비단처럼 고운 모래사장이 있고, 마을 주변 밭에는 시금치와 보리가 바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곳이다. 꾀가 많은 또래 친구들은 어른들의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보리밭에서 술래잡기 놀이로 밭두렁을 가로지르며 놀았고, 첫 구지 해변에서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조그만 바위섬을 향해 모험을 즐기며 수영을 하기도 했다. 봄가을 농번기 철에는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책가방을 집어 던지고 소와 염소들을 위한 어린 풀을 베기도 하고 보리와 벼 이삭을 줍기도 했다.

마을의 굴뚝에서 자욱한 연기가 솟아오르면 배가 고파 석양의 저녁길을 서둘렀고, 날이 어두워지면 희미한 호롱불을 켜야 하는 시절이라 저녁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만 했다. 그 덕분에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부모님들께서도 공부하라는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겨울 농한기에는 일이 없어 실컷 놀았다. 자연이 우리들에게 준 큰 선물이었다. 낮에는 양지바른 곳에 모여 딱지나 구슬을 치고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거나 논에 물이 얼면 썰매를 만들어 탔고, 밤이면 친구집에 모여 물고구마와 동치미로 배를 채우며 밤늦게까지 시시덕거렸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모여 함께 있으면 마냥 좋았다. 달이 뜨지 않은 음력 그믐께는 밤길이 왜 그리 무서웠던지. 추운 겨울에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대면 귀가 길에 방앗간을 지날 때마다 섬뜩했다.

어린 시절 일상은 늘상 자연과 함께였다. 고향은 껍질을 벗기면 이야기가 많고 우리의 우정·사랑·꿈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10대 어린 시절은 내 인생에서 최고의 시간이었던 것 같다. 때 묻지 않은 순수와 사랑이 늘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의 단조로움, 삶의 목표와 가치가 없는 생활은 방황과 번뇌를 촉발시켰다. 잔잔한 파도는 마치 황금빛 모래에게 육지의 비밀을 말하려는 듯 숨막히게 밀려들며 유혹했다. 20대 청소년 시절 나는 내 인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확신이 없으니 성과도 거의 없었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첫 걸음은 원하지 않는 삶을 떠나는 것이다. 무작정 도시에 대한 환상을 품고 파도에 떠밀려 육지로 떠났다. 탈출이 얼마나 쉬운지 몰랐다. 도시는 일단 활력이 있고 짜릿했다. 인생이라고 부르는 격랑의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또래 친구들은 이후 연락이 끊겼다.

청춘과 중년의 시절을 도시와 이국땅에 살면서 이순을 넘어 고희를 향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삶의 뒤를 돌아보게 된다. 결혼하고 자식이 생기니 보금자리가 필요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삶의 끝자락에 와보니 비로소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불꽃놀이가 하찮은 욕망 속에 조용히 얽혀있는지를 깨달았다. 시간을 너무 낭비하고 헛되이 보냈다. 워즈워스의 시처럼 “나는 구름처럼 외롭게 방황했다.”

플라톤은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했다. 어느 순간 어머니의 음식 맛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고향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친구들 간의 순수한 우정이 몹시도 간절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고향은 나에게 더욱 사무치게 의미가 커졌다. 의미 있는 순간과 추억의 기억 없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억은 의미이고 망각은 죽음이다.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존 에드 피어스는 “집은 자라서 떠나고 싶고 나이가 들면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했다. 나는 비로소 고향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삶의 이면에는 늘 죽음이 있고 삶의 현장에는 늘 만남이 있으니 항상 내 안식처요, 걱정 없는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남은여생의 유토피아가 될, 고향으로의 귀향을 간절히 소망해본다.

<이형국 정치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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