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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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묵시록’

2022-12-27 (화) 송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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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까지 간 사랑은 아름답다
잔해가 없다
그곳이 하늘 끝이라도
사막의 한가운데라도
끝끝내 돌아와
가장 낮은 곳에서 점자처럼 빛난다
눈이 따스한 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웠기 때문
눈이 빛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기 때문
촛불을 켜고
눈의 점자를 읽는 밤
눈이 내리는 날에는 연애도
전쟁도 멈춰야 한다
상점도 공장도 문을 닫고
신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체를 받듯 두 눈을 감고
혀를 내밀어보면
뼛속까지 드러나는 과거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다

‘눈의 묵시록’ 송종찬

눈은 내려앉을 자리를 걱정하지 않는다. 순백의 빛깔을 지녔지만 그곳이 진흙이든, 잿더미든, 시궁창이든 가리지 않는다. 강물에 떨어져 가뭇없이 녹더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차별 없는 마음으로 갈 데까지 가고 만다. 서로 다른 색깔과 형태를 뽐내며 맞서고 다투던 것들을 하나로 감싸 안는다. 전쟁을 하다가, 장사를 하다가, 공장을 돌리다가도 흰 눈이 내리면 마음을 멈추게 된다. 모나고 이지러진 것들이 대책 없이 한 이불 덮은 걸 보면 서로가 한 형제인 걸 알게 된다. 갈 데까지 간 사랑은 흔적이 없지만, 올 데까지 오신 사랑은 만물에 스미어 새로운 생명이 된다. 2022년 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반칠환 [시인]

<송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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