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시간을 비워놓고 산에 오른지 꼭 10년이 되었다. 상담 대학원 졸업 후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산에 가고 싶다”란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올랐던 설악산과 교회 야유회로 갔던 북한산 빼고는 등산을 해본 적이 거의 없던 나. 관악산 기슭에 위치한 대학을 다니면서도 관악산을 한번도 올라본 적이 없었고, 미국에 와서도 셰넌도어 국립공원은 10년에 한두 번 정도 차타고 단풍구경 갔던 나에게 찾아온 참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주위에 등산하는 사람도, 같이 가자는 사람도 없었기에 인터넷을 뒤져서 한 산악회를 찾아 첫 산행으로 올드랙(old rag)을 다녀온 후 나는 점점 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힘든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이 그동안 써왔던 과거의 스토리, 그들을 고통 속에 집어넣는 대신 새로운 스토리를 쓰도록 돕는 상담사로서 나 자신을 돌보며 통찰을 확대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땅에 발을 딛고 ‘지금 여기’를 느끼며 인류의 스승인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내가 나의 내면공간을 만나고, 밖으로는 온 우주와 연결되는 소중한 자기 돌봄 시간이다. 또한 무겁게 어깨에 얹힌 내담자들의 눈물, 아픔, 억울함, 슬픔과 상처들을 배낭에 짊어지고 올라가 높은 산 위에 던져놓고 내려오는 일은 다시 내담자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나를 비우고 내면의 공간을 만드는 거룩한 의식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화려한 꽃 잔치도 없고 울창한 초록빛 신록도 사라지고 단풍의 황홀함도 없는, 마치 빛바랜 갈색 사진 같은 쓸쓸한 겨울산을 즐기지 못했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낙엽 진 후에 비로소 보이는 풍경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여름 산행 때는 무성한 나무에 가려졌던 따뜻한 햇살과 푸른 하늘이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선명히 보인다. 먼 곳에 시선을 던지니 건너편 산 중턱에 방금 틀어낸 솜처럼 폭신한 구름바다가 보인다. 더 멀리 겹겹이 보이는 산등성들의 실루엣과 산등성 위에 둘러쳐진 겨울나무 울타리들도 겨울산만이 그리는 수묵화이다.
우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꽃봉오리의 희망을 품고 화려한 꽃을 피우는 봄날도 있고, 때론 싱그러움 가득하고 당당한 초록빛 여름도 누리고, 가끔은 울긋불긋 오색찬란한 단풍과 귀한 열매들로 마음이 풍성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니면 우리 모두는 한때 겨울산의 풍경처럼 춥고 쓸쓸하고 외로운 인생의 겨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둘러보면 혼자인 듯 느껴지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란 절망감을 되뇌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겨울을 걷는 이들. 나에게 찾아왔던 몇번의 인생 겨울을 회상해본다. 그 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화려하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게 되고 더 큰 통찰과 깨달음을 얻은, 나의 마음의 키를 한 뼘 성장시킨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내게 더 깊은 공감 능력을 가르쳐준 학교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 시간들이었다.
지금 인생의 겨울을 지나고 있다면, 낙엽이 진 후에 비로소 보이는 숨겨진 겨울 풍경들에 눈이 열리기를 빈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절망하며 우두커니 땅만 보고 서있으면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그리고 더 높이 보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다. 작은 힘과 용기를 내어 마음의 절망을 밀어내고, 믿음의 눈을 떠서 다가오는 봄과 여름을 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희망’이 그곳에 있음을 꼭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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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 이 심리 상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