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아일랜드의 저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으로 인구에 회자되던 말 그대로였다. 지난 8월 이번 행사가 예고됐을 때 준비성 있게 미리미리 끊어놓았으면 좋았을 걸, 그놈의 ‘혹시 몰라’ 병이 도져 미적거리다 불과 이틀 전에야 부랴부랴 산호세 발 금요일 황금시간대 표를 샀더니 거진 얼마전 새로 취항한 항공사 편으로 한국 가는 비행기 값을 치러야했던 것이다.
날짐승은커녕, 길짐승도 곤충 한마리 구경 못하고 오직 쭉쭉 뻗은 오엽송과 가문비나무로 빽빽한 산길을 2시간여 올라 드디어 해발 2,625m 성당바위(Cathedral Rock)에 이르렀다. 거의 백두산 높이 아닌가. 저 멀리 서쪽으로 손에 닿을 듯 보이는 마운트 찰스턴 픽은 4시간을 더 올라가야한다는데 놀라지 마시라. 높이가 물경 약 1만2,000피트, 일본의 최고봉 후지산에 불과 150m차로 필적할 만한 고봉이라 한다. 라스베가스에 이렇게 높은 산이 있다니 새삼 놀라울 뿐이다.
2,000미터 높이까지 차로 올라온 뒤 걷기 시작한 왕복 3마일의 등반일 뿐이었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나는 어느새 생애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18세 대학 신입생 때, 초딩동창 불알친구 2명과 설악산 대청봉(1,708m)에 단 한번 올라가봤을 뿐, 해발 1,947미터의 한라산 백록담도, 1,915미터의 지리산 천왕봉도 못 가본 쑥맥이었던 나는 호스트인 최선배가 일행들을 위해 자상하게 미리 준비해준 등산지팡이를 짚고 이런저런 정담을 나누며 오손도손 산길을 오른 끝에 이윽고 정상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 생명체라고 본 것은 메뚜기 한마리, 작은 새앙쥐 두마리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군데군데 서있는 난쟁이 관목뿐이었던 척박한 붉은 기암의 ‘불타는 계곡’(Valley of Fire) 주립공원 하이킹에 나서 누천년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코끼리 형상으로 빚어진 엘리펀트 락과 30m 높이의 절벽위에 그려진 인디언 암각화(페트로글리프 Petroglyph)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시공을 뛰어넘어 눈앞에 펼쳐진 수천년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문명의 흔적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소로록… 까마득한 산 아래 전경과 저 멀리 뿌연 황사가 내려앉은 듯 수마일에 걸친 긴 활주로 모양의 데저트 밸리를 내려다보며 서울대 산악부시절 원더우먼이라고 불릴 정도로 산을 잘 타셨다는 최선배의 형수님이 나눠준 에너지 바를 한입 우걱 베어 물었을 때였다.
절벽아래 돌 틈에서 뭔가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어 쳐다보니 세상에… 영판 누가 밀수해 풀어논 조선다람쥐 새끼같다. 먹던 것을 조금 나눠줬더니 얼른 입에 물고는 뽀로로 다시 사라진다. 새끼처럼 보이지만 다 자란 성체로 ‘칩멍크(Chipmunk)’라는 다람쥐의 일종이라고 한다. 기억속의 고향 다람쥐와 비교해보니 붉은 털로 뒤덮인 몸집은 크기가 반밖에 안되는데 얼굴은 물론이요 목에서부터 꼬리까지 이어지는 서너개의 검은 줄과 귀여운 표정이 거의 똑같다. 유일한 차이라면 물음표 형태로 하늘을 향한 한국 다람쥐의 꼬리와 달리 앙증맞은 이 친구는 꼬리가 지면에 닿을 듯 수평이라는 점뿐이다.
산행 후 들른 베가스의 대표적인 카지노 윈(Wynn) 호텔에서는 앉은 자리에서 불과 20분만에 400달러를 따고 과감히 자리에서 일어난 블랙잭 고수 여성동문이 참가자 7명에게 호텔 뷔페를 사며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라스베가스 사흘 있어보니 정말 좋은 곳이다. 난 왜 이리 가는 곳마다 전부 마음을 빼앗겨 이렇게 눌러앉아 살고 싶어질까. 필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촌놈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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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환 팔로알토 부동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