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월드컵으로 가리고 싶은 것

2022-11-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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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영국 사이클링 협회 CEO가 퇴진했다. 환경단체들의 잇단 압력에 밀려서였다. 가디언 등 영국 언론은 이 일을 주요 뉴스로 다뤘으나 미국에 사는 우리와는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참고할 만한 요소가 없지 않다.

문제의 발단은 사이클링 협회가 거대 석유 기업인 셸과 파트너십 계약을 맺은 데 있었다. 협회가 셸과 손잡고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넷 제로(Net Zero)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이 계약의 핵심이었다. 넷 제로는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를 나무 등을 통해 도로 흡수함으로써 지구의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하겠다는 것. 환경정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온실가스 배출의 원인 제공자인 석유회사가 온실가스 추방에 앞장서겠다고? 만우절인가, ‘어처구니없는 거래’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육우를 공급하는 목장주가 양상치를 재배하는 농부에게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게 돕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힐난했다.


셸이 사이클링 협회와 스폰서 계약을 맺은 것은 화석 연료를 공급하는 석유회사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 중 하나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친 환경 단체의 사업을 지원해 셸 역시 친환경 기업인 양하려는, 이른바 그린 워싱(greenwashing)을 시도한 것이다.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이와 유사한 동기에서 기획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강력한 소프트 파워인 스포츠를 이용해 대중이나 세계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고, 이미지 전환을 꿈꾸는 이른바 스포츠 워싱(sportswashing)이다. 정치적인 탄압과 인권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에서 종종 시도한다.

한국서는 지금 미국 메이저 리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는 프로 야구의 등장 배경을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한국 프로야구는 스포츠워싱의 산물이었다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군사 반란에 의해 출범한 5공화국, 신군부 세력은 정권의 정당성과 인권탄압에 쏠리는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프로 야구를 도입했다. 우민화 정책이라는 일부 지적이 당시에도 제기됐으나 정권이 부담스러워하던 국민의 정치 관심과 에너지 일부를 스포츠로 돌릴 수 있었다.

지난 베이징 동계 올림픽과 4년 전 러시아 월드컵 등도 서방에서는 대표적인 스포츠워싱 케이스로 꼽는다. 이들 행사는 인권탄압 등으로 추락한 개최국의 이미지와 위상을 끌어 올리려는 의도에서 기획됐다는 것이다.

카타르 월드컵 역시 이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꼽힌다. 카타르의 인권 상황, 구체적으로는 이주 노동자, 여성, LGBTQ에 대한 가혹한 차별을 월드컵이라는 범 지구촌 스포츠 이벤트로 가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월드컵 경기장과 기반 시설 건설 과정에서 이주 노동자 6,500명 이상이 숨졌다는 보도가 전해지기도 했다.

온라인에서는 카타르 월드컵 보이콧 캠페인이 그치지 않았다. 월드컵 개최 직전인 지난 10월 중순부터 한 달간 해시태그 보이콧카타르(#boycottqatar2022)가 4,300만회 이상 전달됐다는 조사도 있다. 독일 일부 도시에서는 거리 시위도 벌어졌다고 한다.

한인 연구원도 참여한 뉴저지 주의 한 주립대학 조사팀은 이런 이유로 파리, 보르도, 마르세이유를 포함한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공공 장소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하는 월드컵 중계를 금지시켰다고 전한다. 미국 축구 대표팀은 훈련장 내부와 미디어 룸 등에 성 소수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무지개 로고를 부착하고, 영국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축구협회는 대표팀 주장의 완장을 무지개 심장으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차기 월드컵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 등 북미 3개국 공동 개최로 열린다. LA에서도 월드컵 경기를 직관할 수 있다. 설마 이때는 스포츠워싱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인종차별, LA는 심각한 노숙자 문제를 가리려고 월드컵 경기를 유치했다는 말을 듣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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