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리처드 위트컴
2022-11-10 (목)
정민정 서울경제 논설위원
1953년 11월27일 부산 중구 영주동 판자촌에 큰불이 났다. 주택 3,132채가 소실됐고 이재민 3만여 명이 발생했다. 이때 구세주처럼 손을 내민 사람이 당시 미 군수사령관인 리처드 위트컴 장군이었다. 그는 상부의 승인 없이 이재민에게 식량과 의복 등 군수물자를 나눠줬고 이 일로 미 의회 청문회에 소환됐다. 그는 청문회에서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했다. 의원들은 기립 박수로 경의를 표했고 장군은 더 많은 구호물자를 싣고 돌아왔다.
1894년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난 위트컴은 1916년 학군사관(ROTC)으로 군 생활을 시작해 제1·2차 세계대전 등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 중 연합군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지휘해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1945년 일본이 점령 중이던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에서도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정확히 수송했다.
‘군수 전략가’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1953년 미 제2군수사령부 사령관(준장)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200만 톤 규모의 장비와 군수물자를 최전방으로 실어 날랐고 후방 지역 치안 유지는 물론 전쟁 포로와 피란민의 관리 임무도 맡았다. 부족한 의료 시설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미군 장병의 월급을 1%씩 모으는 운동을 벌였다. 덕분에 메리놀병원 등 대형 병원이 부산 곳곳에 설립됐다. 그는 1954년 전역한 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미재단’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지원했고 장진호에서 전사한 미 해병 1사단 병사들의 유해를 송환하는 일에 힘썼다. 1982년 7월12일 작고한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 안장됐다. 6·25전쟁에 참전한 11개국, 2,300여 명의 안장자 중 장성급은 그가 유일하다.
국가보훈처가 위트컴 장군에게 국민훈장 1등급 무궁화장을 추서한다. 위트컴은 자유와 인권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신냉전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민주주의 가치 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굳건한 동맹과 튼튼한 자강 능력이 있어야 나라의 미래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
<정민정 서울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