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0월 하순이면 나는 동부로 떠난다. 뉴저지에 사는 딸네 집에 가서 손자도 만나보고 아이들과 함께 땡스기빙 데이를 지내기 위해서인데 올해는 지난 봄 애틀랜타로 옮겨온 아들네도 합류하기로 돼 있어 발길이 더 바빴다. 대륙을 가로질러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모습에서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에 자녀들을 위해 시골의 부모들이 서울로 올라간다는 한국의 ‘역귀성’ 풍속을 본다.
그러나 내심 이맘때가 한창인 뉴저지 단풍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유가 큰 것도 사실이다. 지난 해 왔을 때는 집이 바닷가에 있었기 때문에 기차를 타고 내륙으로 단풍을 찾아 나섰으나 올해는 산속으로 이사 온 뒤라 집 주변과 오르내리는 길목 길목마다 노랑색, 갈색, 붉은색의 단풍들이 온통 꽃등불 타듯 둘러쳐있다. 마침 올해는 수년 만에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해라고 해서 그런지 더욱 눈이 부셨다.
단풍을 쳐다보고, 떨어진 낙엽을 쓰다듬다가 서정주 선생의 ‘푸르른 날은’을 기억한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ㅡ’ 맞다. 보기에 마냥 곱고 여린 단풍이지만 실은 다음해 또 다른 잎새를 피우기 위해 물길을 막아 단풍이 되고 그런 다음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는 오묘한 생존 방식 앞에 조금은 숙연해진다.
자기 자신을 죽이며 또 다른 생명을 잉태시키는 단풍의 희생정신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이태원 참사 소식을 듣는다. 선진국 7위라고 자랑하는 문명국가에서 그런 후진국 형 압사사고가 일어나다니… 그러나 더 슬픈 소식은 그 사고 자체보다도 대통령에서부터 경찰 수장에 이르기까지 ‘내 잘못은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 흉물스런 모습들이다. 떨어지지 않으려 바둥대면 바둥댈수록 초라해지는, 단풍보다 못한 미물들이다.
단풍에는 질서가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추운 곳에서 덜 추운 곳으로,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번져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본시 자라났던 그 땅으로, 여럿이 모여 있는 낙엽 쌓여있는 그 곳으로 자연스레 떨어져 간다. 거기가 태초의 고향인 것을 알고 있는 듯 매우 질서있게…. 중간선거가 끝났다. 선거에서 패배한 사람, 선거에서는 이미 이겼지만 국민의 지지를 잃은 사람도 그 같은 순리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LA에서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다. 아이들을 데리고 뉴욕으로 와서 살던 성공한 이민자가 있었다. 아이들이 다 장성하고 자리 잡을 무렵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며 훌쩍 LA로 옮겨와 시니어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서 역시 혼자 된 고향의 소꿉장난 여자 친구를 만나 외롭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이 여자 친구가 어느 날 캐나다에 살고 있는 딸네 집으로 간다고 떠나자 자기도 더 늙기 전에 결심했다며 뉴욕으로 갔다고 한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뒤 늦게 자녀들 곁으로 돌아갔을까.
필시 도연명의 ‘귀거래사’가 그 마음은 아닐는지… ‘자, 돌아가자 전원은 황폐해 가는데 내 어이 아니 돌아가리, 머슴 아이 반갑게 나를 맞이하고 어린 자식은 문 앞에서 기다린다. 고요히 해는 지고 외로이 서있는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나의 마음은 평온으로 돌아온다. 자연의 조화를 따르다 마침내 돌아가면 그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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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