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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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를 높여가는 지구촌의 슬픔

2022-10-31 (월) 데이빗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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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데뷔 당시 테일러 스위프트는 대단히 로맨틱한 가수였다. 그녀는 주로 젊은이들이 겪는 사랑의 환희와 슬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스위프트의 별이 휘황하게 떠오를수록 그녀의 노래에 담긴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미드나이츠(Midnigts)라는 타이틀이 붙은 그녀의 새로운 앨범은 불안감, 조바심, 탈진과 분노 등 부정적인 감정을 노래한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 가운데에는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난 여성을 위해 옷을 입지 않아/ 남자들을 위해 옷을 입는 것도 아냐/ 난 그저 복수를 위한 옷을 입을 뿐이야.”

스위프트가 유별난 게 아니다. 그녀는 단지 거대한 추세의 부분에 불과하다. 샬롯 브랜드, 알베르토 아세르비와 알렉 메소디는 1965년부터 2015년 사이에 발표된 15만 곡 이상의 팝송을 분석했다. 이 시기에 인기차트 탑 100에 오른 곡들 가운데 ‘사랑’(love)이라는 가사의 등장 횟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반면 노랫말 가운데 ‘미움’(hate)과 같은 부정적 감정어가 등장하는 횟수는 가파르게 늘어났다.


대중음악만 부정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데이빗 로자도, 루스 휴즈와 자스민 할버스타트는 2000년과 2019년 사이 미국의 인기 있는 47개 뉴스매체가 써낸 기사의 헤드라인 2,300만개를 분석했다. 그 결과 분노, 두려움, 환멸과 슬픔 등을 전달하는 부정적 헤드라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좌파성향 매체들의 헤드라인에 부정적인 것이 많았지만, 우파성향 매체의 간행물에 담긴 부정적 헤드라인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문화의 부정적 성향은 현실을 반영한다. 미국의 종합사회조사기관인 제너럴 소셜 서베이(GSS)는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그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도를 평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1990년에서 2018년 사이, 스스로를 최저 수준의 행복의 범주에 넣은 미국인의 비중은 50% 이상 늘어났다. 게다가 이건 팬데믹 이전의 일이다.

나라 밖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갤럽은 매년 140여개국 15만명을 대상으로 그들이 살면서 느끼는 감정에 관해 묻는다. 지난해 실시한 서베이에서 스트레스, 슬픔, 분노, 근심과 신체적 고통 등과 연결된 부정적 감정이 역대 최고점을 찍었다.

동일한 서베이에서 갤럽은 조사 대상자들에게 그들의 삶이 제로에서 10까지의 눈금 중 어디에 서있는지 평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여기서 0은 상상 가능한 최악의 삶, 10은 최상의 삶을 각각 의미한다. 16년 전, 전 세계의 응답자들 가운데 단지 1.6%만이 그들의 삶을 제로로 평가했다. 이에 비해 상상 가능한 최악의 삶을 살고 있다고 답한 지난해 응답자는 15년 전에 비해 4배로 늘어났다. 그들이 느끼는 불행의 강도 역시 커졌다. 2006년, 최하위 20%에 속한 응답자들이 스스로에게 매긴 평점은 2.5였다. 15년 뒤인 지난해 같은 그룹에 속한 응답자들의 자체 평균점은 1.2로 떨어졌다.

갤럽 최고경영자인 존 클리프톤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2021년 인도 국민의 21%가 스스로의 삶에 0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도와 중국, 브라질과 멕시코에서 부정적인 감정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비참한 느낌을 받는다. 가장 최근 여론조사에서 직장에서 잘하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20%, 무관심하다는 답변이 62%, 비참하다는 응답은 18%이다.

문제의 일부는 공동체의 몰락이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구상의 인구 가운데 20억 명은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너무나 싫어 친구에게조차 추천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중국과 인도에서 특히 심하다.

또 다른 부분적 이유는 기아다. 2014년 세계 인구의 22.6%가 온건하거나 혹독한 식량 불안정에 직면했다. 2020년에 이르러 이 수치는 30.4%로 올라갔다.


물리적 고통이 증가한 것도 문제의 일부다. 2006년, 그들의 삶을 최악으로 평가한 사람들의 30%가 매일 고통을 겪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들 중 45%는 매일 고통을 안고 산다고 응답했다. 팬데믹 이전에 늘 고통을 경험한다고 답한 사람들의 비중은 모든 연령층에서 늘어났다.

필자는 이런 수치에 깜짝 놀랐다. 중국과 인도는 이전에 비해 부유해졌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늘 웰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경제개발이 불평등을 확대시키는 게 부분적인 이유다. 클리프톤이 “사각지대: 글로벌 차원의 불행 증가, 어떻게 지도자들은 이를 놓쳤나”라는 제하의 저서에서 밝힌 요점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국민의 행복도를 측정할 때 전통적으로 국내총생산(GDP)을 비롯한 물질적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나 이들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삶을 평가하는 척도로는 부적절하다.

유권자들이 느끼는 불행은 정치에 영향을 준다. 이와 관련해 제임스 카빌이 남긴 명언이 있다. “문제는 경제야, 멍청아.” 그러나 그건 편협한 생각이다. 진짜 문제는 공동체 응집력이라든지, 존중받는 느낌, 사회적 접속 등과 같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한 감정이야, 멍청아.

MIT의 조지 워드는 주관적인 웰빙의 척도는 경제적 척도에 비해 선거 결과의 예측에 더욱 잘 맞는다고 주장한다. 아랍 봉기 이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의 웰빙 지수는 떨어졌다. 브렉시트 이전에 영국이 웰빙 지수 또한 추락했다. 2012년 선거에서 공화당에 몰표를 던지고, 2016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한 미국의 카운티 주민들은 그들의 삶을 최악으로 평가했다.

만약 불행 지수가 계속 올라간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먼저 포퓰리즘의 수위가 올라갈 것이다. 둘째, 전반적인 시민소요가 늘어나게 된다. 글로벌 평화지수에 따르면 폭동, 파업, 반정부 시위 등 시민적 불만은 2011년부터 2019년 사이에 244%의 증가세를 보였다.

우리는 감정의 불평등이 확대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갤럽의 조사가 시작된 이래 세계 인구의 상위 20%는 줄곧 최고 수준의 행복과 웰빙을 누리며 살아간다. 최하위 20%는 최악의 삶을 경험한다. 이건 근본적으로 부당하고 불안정한 상황이다. 세계의 감정적 건강상태가 산산조각으로 깨지고 있다.

<데이빗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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