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폴 크루그먼 칼럼] 공화당을 장악한 좀비 레이거노믹스

2022-10-05 (수)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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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2년간의 계획이 무엇이냐고? 행복과 건강, 그리고 성공을 누리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 무얼 할 것이냐고? 당신 뭐야,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지난주 하원 공화당이 발표한 ‘미국에 대한 헌신’(Commitment to America)의 정수를 나름대로 요약해 보았다. 이 ‘계획’은 1994년에 나온 깅리치의 ‘미국과의 계약’을 떠올리게끔 만들어졌다. 알다시피 공화당은 미국과의 계약을 앞세워 의회를 장악했다.

당시에도 미국과의 계약을 바라보는 시각은 확연히 갈렸다. 물론 필자는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그룹에 속했지만, 그래도 깅리치의 계약은 추진해야 할 입법안 목록과 함께 상당히 구체적인 정책 아젠다를 제시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화당의 이번 계획은 그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주장하는 희망사항만 줄줄이 나열되어있을 뿐, 어떻게 목표점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헌신의 경제관련 대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낯익은 몇몇 아이디어의 희미한 윤곽이 드러난다. 바로 좀비 레이거노믹스다. 여기서 문제가 제기된다. 근로자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했노라 주장하는 정당의 지배적 이념이 여전히 규제해제, 베니핏 삭감과 부유층 감세인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이전에 먼저 경제관련 부분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살펴보자.

첫째, 경제와 관련해 공화당이 제기한 불만은 (이미 정점에서 내려선) 가스 가격이나 (진정되고 있는) 공급망 교란처럼 정부의 정책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안들이다.

둘째, 하원 공화당은 “경제 치유책을 갖고 있다”고 선언한 후 곧바로 “정부의 예산낭비를 막겠다”고 말한다. 예산 논의를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빈말임을 안다. 구체적으로 정부의 어떤 지출을 막겠다는 걸까?

연방정부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거느린 보험회사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부지출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헬스케어, 은퇴연금과 국방비다. 이들 중 하나의 예산을 사정없이 쳐내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수준의 지출 삭감을 이룰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가운데 어디서 예산이 낭비되고 있는가?

전국 공화당 상원의원회 의장인 릭 스캇 상원의원은 5년마다 소셜시큐리티와 메디케어를 포함한 모든 연방 프로그램의 일몰제를 요청했다. 일몰제가 실시되면 미국의 사회 안전망은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다른 공화당 의원들은 스캇을 의장직에서 축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시한 정책 아이디어와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자, 다시 물어보자. 그들이 삭감하려는 낭비성 지출이 무엇인가?

이쯤에서 다시 미국에 대한 헌신으로 돌아가자. 이건 ‘감세와 규제해제를 촉구하는 성장 중심의 경제 프로그램’이다. 구체적 방안은 제시되지 않았지만 분명 좀비 레이거노믹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왜 ‘좀비’인가? 지난 40년 동안 규제해제와 부유층 감세가 고임금과 빠른 경제성장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경험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세가 번영의 비결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미 오래전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규제해제와 부유층 감세는 아직도 죽지 않고 좀비처럼 어정대면서 공화당의 뇌를 파먹고 있다.

물론 필자가 마르크스주의자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지금의 공화당은 누진세와 사회보험을 지지하는 사람을 싸잡아 마르크스주의자라 부른다.) 하나마나한 말이겠지만, 금융시장은 필자의 비관론을 공유한다. 영국의 경우를 살펴보라. 리즈 트러스 총리가 레이거노믹스와 유사한 경제계획을 발표하자 금리가 치솟으면서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했다.

여기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공화당은 실패한 경제 이념에 매달리는가?

오랫동안 공화당의 경제관은 토마스 프랭크의 저서 “캔자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에 묘사된 내용의 실사판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공화당은 부유층을 더 부유하게 만드는데 전념하면서 사회적 이슈에 바탕해 선거에서 승리를 따내는 정당이다. 실제로 공화당은 선거에서 사회적 편견을 주요 이슈로 제시한 후 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감세와 베니핏 축소로 급선회했다.

하지만 MAGA의 부상으로 사회적 편견에 영합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공화당의 마케팅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화당의 핵심 아젠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이 재력가 친화적인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이유가 무언가? 왜 진정한 포퓰리즘을 아젠다에 추가로 섞어 넣지 않는 건가? 공화당이 하원을 탈환할 경우 하원의장직에 오를 것으로 보이는 케빈 매카시가 국세청에 대한 추가 예산 폐지안을 그의 첫 번째 법안으로 상정하겠다고 공언한 이유는 또 무얼까? 부유한 세금 사기꾼들에게 숨 돌릴 틈을 주기 위해서일까?

낙태와 LGBTQ, 이민에 반대하는 전사들은 경제정책에 무지할 뿐 아니라 관심조차 없기 때문에 감세 신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커리어를 삼아온 의회 스탭진과 보수적인 싱크탱크 멤버들 및 정치꾼들의 손에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이 부분적 대답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전략이 있다. 억만장자들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공화당을 주도하지 않지만 당은 여전히 그들의 돈을 원한다. 따라서 재력가 친화적인 정책들은 우익의 사회적 아젠다에 불편함을 느끼는 부유한 기부자들과 기업들을 그들의 진영에 묶어두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은 유권자들이 공화당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라야 비로소 효과를 낼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미국에 대한 헌신의 부실한 내용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 드러난다. 공화당이 실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유권자들이 아는 것이 그들에겐 커다란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현재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미국내 최고의 거시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MIT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타임스 경제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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