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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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GPS

2022-09-29 (목)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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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위성을 우주에 띄워 각 위성에서 나오는 전파를 통해 지상 물체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장치가 지피에스(GPS)다. GPS는 원래 적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전략을 짜는 군사용 장비였다. 지금은 자동차, 비행기, 선박의 정확한 위치는 물론 골프 칠 때 각 홀의 거리를 측정하는 등 우리 삶의 곳곳에 이용되는 편리한 기기다.

GPS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 동물의 귀향 본능 유전자이다. 철새와 연어가 대표적이다. 성숙한 연어는 삶의 마지막 시기에 자신이 태어난 곳을 찾아 종족유지의 목표를 수행한 후 생을 마친다. 귀향 본능 유전자가 프로그램 되어있어 어느 누구도 연어의 먼 여정을 막을 수 없다.

우리 몸에 GPS나 귀향본능 유전자가 있을까? 아직까지는 없다는 게 정설이다. 물리적 위치는 GPS가 없어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이 어디쯤에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인생길을 잘 몰라 종종 혼란 속에 방황한다. 단지 심리적 발달과정의 위치를 보여주는 종 모양의 분포 곡선(Bell Curve)을 보고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오목하게 올라와있는 가운데 부분을 기준으로 한 쪽은 올라가고 한 쪽은 내려가는 것이 종 모양의 곡선이다. 생물학적으로 몸과 마음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곡선 가운데 불쑥 올라온 부분으로 이후 나이를 먹으며 점점 내려간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은 약해지고 기억도 흐려지고, 판단력도 줄어든다. 어떤 이는 늙으면 더 지혜롭다 하는데 이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인간의 성장발달은 몸과 마음이 한 조를 이루어 변화하기 때문이다. 2,500년 전 공자님께서 나이를 지칭하는 용어를 논어에 적어놓았다. 아무렇게나 언행을 해도 세상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70대 종심까지는 잘 평가했지만 80대는 그저 10년이 8번째 돌아오는 나이, 산수라 이름 붙였다. 공자님이 73세에 세상을 떠서 그 뒤의 삶은 알 수 없었을 겻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 십년마다 삶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성품(Trait), 성격(Personality), 희망, 가치관도 달라진다. 성품은 태어날 때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어 큰 변화 없이 한평생 지니고 산다. 행동유전학에 의하면 생후 5개월 쯤 된 아이에게 단순한 장난감을 보여주면 아이마다 다르게 반응한다. 예를 들어 장난감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는 부끄러움을 잘 타는 내성적 성품, 장난감을 신기하게 여겨 이리저리 만져보는 아이는 사교적이고 외향성 성품으로 살아간다는 주장이다.

반면 성격은 유치원부터 사춘기까지의 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이 기간 아이들이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멘토나 롤 모델의 존재가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가치관, 희망은 유전자보다 주로 환경요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삶에 잘 적응하도록 항상 변한다는 것이다.

이제 장수시대다. 노년이라고 세상일에 관심을 모두 끊을 수는 없다. 노년은 모든 신체조직이 성장을 멈추고 약해지는 시기요, 배우자, 친구, 소유물, 건강 등 여러 상실을 맛보는 시기다. 심리적으로 자기중심적이 된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다는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체면 보지 않고 아이처럼 떼쓰며 원한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이 나온 이유다.

노인들의 GPS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희망을 잘 살펴 지금 여기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야 된다. 허상에 집착과 욕망을 품고 매달리거나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래야 신체적 연약함, 사회적 상실감, 심리적 역행, 뇌 조직 퇴화를 지연시킬 수 있다. 노년에는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도 밖으로 나타내지 말자.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이기 때문이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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