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디자인 결함

2022-09-10 (토)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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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휴가차 뉴욕과 보스턴에 사는 두 아들 녀석을 방문하고 왔다. 차 운전 대신 기차로 말이다. 제법 일찍 예약을 해서 그런지 워싱턴 DC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가 며칠 머물다 다시 보스턴으로 이동한 후 돌아오는 기차표 전체가 100달러가 채 안 되었다. 원래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자동차 개스비보다 저렴한 이 교통수단이 제법 맘에 들었다.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도 편히 즐기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쉴 수 있어 진짜 휴가를 다녀온 듯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기차역까지도 오래간만에 내가 살고 있는 곳 가까운 곳에 정차하는 VRE (Virginia Railway Express)라는 통근열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탑승권 구매 모바일 앱도 핸드폰에 설치했으나 사용에 익숙하지 않아 정차역에 비치되어있는 매표기를 통해 표를 구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통근열차 출발시간 10여 분 전에 역에 도착해 매표기에 적혀진 매표 절차를 따랐다.

먼저 스크린을 누르고 목적지 역을 선정했다. 그리고 매입할 표 매수를 입력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인 크레딧카드를 매표기에 넣었다. 이제 표가 나오면 된다. 그런데 안 나온다. 아니, 왜 그러지? 이상하다. 매표기를 자세히 다시 보니 내가 크레딧카드를 표가 나오는 곳에 넣었던 것이다! 크레딧카드 투입구는 바로 위에 따로 있었다. 어이쿠, 이럴 수가.


넣었던 크레딧카드를 빼내야 되었다. 그런데 너무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양손의 엄지와 검지 손톱들을 사용해 약간 밖으로 나와 있는 카드 끝을 잡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잘 안 되었다. 여행을 떠난다고 손톱도 잘 다듬고 나왔던 것이다. 어디 연장이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필 또 아침 출근시간이라 제법 많은 통근열차 이용자들이 있었는데 내 뒤를 지나가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는 듯했다. 아, 창피해. 나 아는 사람 있으면 어떡하지. 그래도 크레딧카드는 빼야하는데.

이제 열차 도착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표를 빨리 매입해야했다. 다행히 옆에 또 다른 매표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 매표기에서 이번에는 다른 크레딧카드를 제대로 넣고 표를 발부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다시 첫 매표기로 돌아가 카드를 빼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카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통근열차는 도착했다. 포기하고 열차를 타야했다. 그래 할 수 없지. 조금 밖으로 나와 있는 카드를 아예 확 밀어 틈 안으로 다 들어가도록 했다. 매표기 관리인 외에는 그 누구도 크레딧카드를 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통근열차에 올라타고 나서도 크레딧카드가 걱정되었다. 그래, 카드 회사에 연락해 취소하자. 다행히도 핸드폰에 크레딧카드 앱이 설치되어있어 취소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취소 이유를 묻는 질문에 선택할 수 있는 대답에는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럴테지. 누가 과연 그런 실수를 하겠나. 모르겠다. 그냥 잃어버렸다고 하자. 마침 그 몇 주 전 둘째 애가 애플페이를 사용할 수 있도록 내 핸드폰에 설치해주었다. 그래서 카드 분실 신고를 접수한 크레딧카드 회사가 바로 새 카드를 발급해서 애플페이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좋은 세상이다.

카드 분실신고까지 다 마친 후 숨을 좀 돌릴 수 있게 되자 매표기 에피소드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지. 이 모든 것은 매표기의 다자인에 결함이 있어서 그랬던거야! 크레딧카드 넣는 투입구와 표 나오는 곳의 규격을 다르게 만들었어야해. 애초에 표 나오는 틈에 크레딧카드가 들어갈 수 있으면 안 되지. 분명히 디자인 결함이야. 이런 게 바로 로스쿨에 다녔을 때 배웠던 design defect라는 거야. 집단 소송이 가능하지 않을까? 입가에 묘한 미소가 찾아왔다. 그런데 나중에 두 아들 녀석에게 그렇게 얘기했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결함이 있는 것은 매표기 디자인이 아니라 내 머리란다. 내 머리.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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