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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저물가 시대의 종언과 정치 리스크

2022-09-01 (목)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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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저지 일대의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3달러 후반이다. 최근 다소 떨어진 것이지만 주민들은 ‘한참 멀었다’는 반응이다. 1~2년 전에는 2달러대였으니 조금 나아진 것일 뿐 여전히 비싸다는 것이다. 미국 동네 마트의 삼겹살 값은 현재 파운드당 7.99달러 수준이지만 1년 전에는 4.99달러였다.

저물가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아구스틴 카르스텐스 사무총장은 “세계경제가 세계화의 후퇴로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계속되는 새로운 인플레이션의 시대로 치닫는 중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지난 20년간 기록적인 저물가를 누려왔다.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미국 상품 가격의 연평균 상승률은 불과 0.4%였다. 근원 인플레이션은 연평균 1.7%에 그쳤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물가 목표치(2%)보다 한참 낮은 수준이다. 1990년대 중국이 경제 문호를 개방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해온 덕이 컸다. 자유로운 무역을 바탕으로 원자재 가격은 안정됐고 기업들은 해외 곳곳에서 적시 생산(Just-in-Time)한 상품을 적시에 공급받을 수 있었다.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이 세계 각지에 퍼져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미중 무역 갈등과 코로나19,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거치면서 공급망이 구조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 값싼 일자리에 달려드는 인력을 찾기 어렵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값싼 노동력이 무한히 공급되는 시대가 끝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연준을 비롯한 중앙은행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 지난해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할 무렵 연준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오판했다. 어쩌면 그 이전에 코로나19 팬데믹 대응 전략 자체가 오판이었을 수 있다. 과거 2000년대에 겪었던 경제 불안은 대부분 수요의 위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에 중앙은행들은 팬데믹이 발생하자 수요 감소를 막기 위해 숨 가쁜 속도로 금리를 끌어내렸다. 그러나 정작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것은 수요가 아니라 공급이었다. 수요를 지탱한 정책은 공급 쇼크를 맞으면서 오히려 독이 됐다. 일본을 제외하면 현재 세계 주요국 중 역사적 고물가에 시달리지 않는 곳이 없다.

물론 중앙은행에만 책임을 묻기에는 가혹한 측면이 있다. 오히려 세계화의 붕괴는 정치적 판단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시절 “미국이 세계의 돼지 저금통이 되지 않겠다”며 중국 등 해외에 관세를 부과하고 노동력 유입을 막았다. 세계는 이를 ‘미국 우선주의’라고 표현했지만 그 결과 미국인들이 저렴한 물가를 누리지 못하게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연 당시의 판단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했는지는 의문이다.

고물가를 부추기는 정치 리스크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최근 1인당 최대 2만 달러의 학자금대출 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투입 재정이 연간 최대 240억 달러 수준인 이 정책을 두고 도덕적 해이 논란보다 인플레이션을 자극한다는 비판이 뼈아픈 대목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올 상반기 인플레이션을 국내 정책의 최우선 의제로 삼겠다고 발표했지만 11월 중간선거를 의식해 내놓은 이 정책은 그 궤도에서 확실히 벗어나있다. 권력의 쟁취를 최종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정치는 포퓰리즘의 유혹 앞에 흔들리기 쉽다.

현재 주요국의 물가 상승률은 1981년 이후 41년 만에 최대 수준이니 세계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상당수는 돈벌이를 시작한 후 지금과 같은 인플레이션을 처음 겪을 것이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마저 “우리는 한동안 인플레이션 문제가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며 “(현시점에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불확실성이 큰 시기라는 의미다. 중앙은행과 행정부가 각각 수요 감축, 공급망 재건이라는 각자의 역할에 전념해야 할 때다.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 전환기에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중앙은행과 정부의 역할과 책임이 막중하다는 점도 같다. 적어도 지금은 정치가 경제의 리스크가 돼서는 안 된다.

<김흥록 서울경제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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