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떡은 잔칫날의 상징이다. 어르신들의 고희 산수는 물론 아이들의 백일 첫돌 잔치에 어김없이 올리는 기쁨의 덩어리. 샌프란시스코에서 엘파소까지 무거운지 모르고 들고 갔던 손자 돌 시루떡, 마냥 기쁘고 행복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들은 금덩이고, 딸은 금의 번쩍이는 빛에 가려져 그림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그때, 오빠가 독학으로 일차 고시시험에 합격하고 부모님은 잔치를 벌였다. 지지고 볶고 삶고 무치고, 생선부침은 물론 내가 좋아하던 잡채와 고등어볶음이 초록색 파와 빨간 고춧가루에 옷을 입고 상위에 촘촘히 놓여졌다. 그 위층에는 오늘의 주인공이 마지 자기인 양 한껏 분위기를 띄워주었던 시루떡. 무지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건포도가 ‘축하’라고 글을 써주었고, 보기만 해도 기뻤던 가족의 기쁨. 그 시루떡은 온 동네에 돌려졌다. 지루해하던 멍멍이가 신이 나서 함께했고, 어르신들은 맨발로 나와서 축하하고 떡을 받으시고…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 나의 뿌리가 내려지기 시작했다.
이 뿌리는 미국을 건너와 사십년 이상의 세월을 지나면서 여러 흙과 뭉치고 다져지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석인교수의 학술저널에 의하면 “정체성의 형성은 전 생애를 걸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모든 이민세대들의 문제이다”라 하지만 문화의 재창조에 의하여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나 역시도 어떤 때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한국에서 미국에서 밀려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균형 맞추어 사는 걸 포기한다던가, 한국문화를 저 멀리 버렸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한국의 문화를 어떻게 더 많이 보고 배울 수 있을지, 그 문화를 어떻게 내 자신이 습득하여 주위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지 하며 고심한다. 미국문화에 절여지지 않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을 때 이웃과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고 싶었다. 같이 공부하는 글샘터 회원님은 물론, 부족하지만 이메일로 메시지로 격려와 관심과 용기를 불어주었던 님들과… 그 시루떡은 모두에게 돌려졌고, 그리고 기뻤다. 잠깐의 흔들림이 있었다면 확실치 않은 몇 분에게 어찌해야하나? 혹시 시루떡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당뇨가 있기에 꺼려하지는 않는지, 떡 자체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닌지, 아니면 시루떡보다는 콩이나 달콤한 검은깨가 있는 떡을 더 좋아하지는 않는지…
십년이 지난 후 아직 내가 있다면, 나의 재창조되는 문화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긍금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님들께 돌렸던 시루떡, 다음에는 각각에 맞는 떡으로 인절미, 꿀떡, 영양떡, 두텁떡, 경단, 약식, 그리고 맛깔 나는 케익으로 돌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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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김 / 뉴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