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다보면 자주 하는 생각 ‘그게 다야?’

2022-08-11 (목) 하은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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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The Best Is Yet to Come). ‘마이 웨이’의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의 묘비명이다.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팝의 제왕’ 프랭크 시나트라와 전설의 재즈 가수 페기 리 헌정 콘서트가 지난달 할리웃 보울에서 열렸다. 이 날은 10대 딸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아버지 관객들이 많았다. ‘배드 가이’로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뒤흔든 싱어송라이터 빌리 아일리시의 출연 덕분이었다.

페기 리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할리웃보울 100주년 축제 출연을 결정했다는 팝스타 빌리 아일리시.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 터져나온 10대들의 괴성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힐 기세였다. 페기 리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그녀는 이날 평상시와 달리 블랙 턱시도 재킷과 롱 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섰다. 그리고 크리스천 맥브라이드의 베이스 연주에 맞춰 1958년 발표된 페기 리의 대표곡 ‘피버’를 그녀 만의 그루브로 소화했다. 불후의 명곡, 페기 리가 커버한 팝의 고전 ‘피버’(Fever)를 빌리 아일리시의 음색으로 듣는 건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페기 리와 빌리 아일리시의 공통점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음색이다. 서로 전혀 다르면서도 묘하게 같은 여운을 남기는 ‘피버’를 말하듯 노래한 빌리 아이리시는 자신의 삶을 바꾼 페기 리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헌정 무대에 서게 되어 영광스럽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전설의 락밴드 ‘블론디’의 보컬리스트 데비 해리를 다시 무대로 불러냈다. 피날레 무대에 또 나오기까지 빌리 아일리시 만큼이나 뜨거운 환호를 받은 76세의 데비 해리. 그녀 만의 독보적인 허스키 보이스는 여름 밤 내내 관객들을 감전시켰다.


그렇게 이날의 하일라이트 공연이 시작되었다. 데비 해리와 빌리 아일리시의 듀엣 ‘그게 다야?’(Is That All There Is?). 이 노래는 페기 리의 인기가 한 풀 꺽였던 1969년 그야말로 어쩌다가 그녀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온 곡이다. 또, 49세의 페기 리를 컴백하게 만들어 그래미상을 안긴 곡이다. 토마스 만의 단편소설 ‘환멸’를 말하듯 읽다가 “(그래서 뭐?)이게 다야?”를 권태롭게 내뱉는다. 성취감을 얻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막상 경험하고 나면 찾아오는 권태로움, 너무도 귀중한 것을 잃었을 때 느끼게 되는 상실감을 표현한 구절이다.

“그게 다야?”를 반복하는 노랫말은 페기 리의 불운했던 삶이 반영되면서 용기를 갖게 만든다. 페기 리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잃고 폭력을 행사하는 의붓 어머니의 손에 자랐다고 한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라디오를 들으며 위안을 받았고 어느 날 재즈 피아니스트 ‘카운트 베이시’의 음악을 우연히 들은 후 재즈 가수의 꿈을 꾸었다. 의붓 어머니의 폭력에서 벗어나고 싶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스윙 재즈’의 대부 베니 굿맨에게 발탁되어 재즈 보컬리스트로 1940~50년대를 풍미했다.

데뷔 6년을 맞은 빌리 아일리시는 페기 리와는 판이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일곱 살에 우쿨렐레로 처음 작곡을 했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기타와 피아노를 독학했다. 공동 작업자이자 아일리시의 절친인 그녀의 오빠는 작곡 천재로 남매는 ‘더 자유롭게 예술적 관심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홈스쿨링을 받았다. 사실 빌리 아일리시의 부모가 홈스쿨링을 시킨 직접적인 이유는 그녀의 투렛 증후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복적으로 심한 틱 증상을 보이는 그녀가 의지와 상관 없이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모습이 실제로 유튜브 영상에 올라있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빌리 아일리시를 두고 ‘팝의 여제’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이제 스물 한 살인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칭호일 수 있다. 그렇지만 10대 소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감안하면 ‘여제’라는 말 밖에 떠올릴 수가 없다. 페기 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빌리 아일리시인데 그녀의 음악은 어딘지 음울하다. 우울증을 앓았을 때 그녀는 천재 작곡가 오빠와 함께 노래의 화자를 만들어내고 보통의 10대들처럼 상상 속에서 투쟁을 했다. 그래서 빌리 아일리시를 추종하는 10대 팬들에게 그녀는 생명 줄과 같다. 2020년 그래미 역사상 최연소 아티스트로 올해의 노래와 앨범 등 5관왕에 오른 그녀는 그 해 패션매체 ‘보그’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은 어디든 숨어 있다. 그리고 난 늘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은 속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뭘 하든 늘 안쪽에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늘 ‘단순한 답’ 찾기 방식을 터득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에는 단순한 답이 있다. 복잡한 인생살이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그게 다야’라고 툭툭 털어버리자. 인생을 살다보면 자주 하는 생각 아닌가. “됐어, 거기까지” 그야말로 그게 다인 거다.

<하은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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