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길을 30년 넘게 산책하다보니 이웃집들 모양새가 내 집처럼 이무럽다. 조금만 바뀌어도 금방 알아차린다. 두어 달 전 산책길에 낯선 국기를 현관에 게양한 집이 눈에 띄었다. 파랑과 노랑의 가로 줄무늬 깃발이었다. 맞은 편 집 잔디밭에도 판지에 어설프게 그린 똑같은 국기가 꽂혀 있었다. 시멘트 보도바닥에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등 색분필로 쓴 격문을 보고 그것이 우크라이나 국기임을 알았다.
십수년 전엔 더 아리송한 깃발이 몇몇 집에 내걸렸었다. 무지개를 닮은 여섯 줄의 색동 깃발이다. 그게 성소수자(LGBTQ)들의 인권존중과 차별반대를 주창하는 동성애 단체들의 ‘자긍심 깃발(Pride Flag)’임을 한참 후에 알았다. 1978년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프리덤 데이(6월25일)’ 시가행진에 처음 등장했다.
그 무지개 깃발이 열흘 전 서울시청 광장을 뒤덮었다. 코로나 팬데믹을 뚫고 3년만에 ‘퀴어 축제’가 열린 날이다. 매무새가 깃발 색만큼이나 튀는 젊은이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앨리(Ally, 동맹자)’들이 폭우를 아랑곳 않고 몰려 나왔다. 신부와 수녀도 여럿 보였다. 국제행사가 아니지만 미국·영국·독일·캐나다·호주 등 주요 외국의 대사들이 연단에 올라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퀴어 축제는 원래 지구촌 행사다.
성소수자들 면면은 깃발보다도 복잡하다. 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의 머리글자를 따 LGBT로 통칭됐다가 ‘퀴어(Queer: 야릇하다는 뜻)’의 Q가 추가됐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간성애자(Intersexual), 성충동을 못 느끼는 무성애자(Asexual), 섹스의 대상을 가리지 않는 범성애자(Pansexual) 및 변태 성애자(Kink) 등을 아우른다. 결과적으로 성소수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LGBTQIAPK’로 길어졌다.
희한한 구제조치도 있었다. 오리건 주민 제이미 슈프는 성별이 ‘X’로 기재된 운전면허증을 5년전 전국최초로 발급 받았다. 군 제대 후 여성으로 살아온 그는 ‘M’(남성)으로 명기된 면허증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 일쑤라며 무특정 성인 X로 표기해달라고 탄원했었다. 캘리포니아의 새라 키난 여인은 출생지인 뉴욕 시청으로부터 성별이 ‘I’(간성)으로 기재된 출생증명서를 2016년 발급 받았다. 역시 사상최초다.
미국정부는 퀴어들과 LGBT를 뭉뚱그려 ‘논 바이너리(non-binary)’로 지칭한다. 2분법적 남녀구분이 적용되지 않는 부류라는 뜻이다. 완벽한 남녀로 창조된 아담과 이브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논 바이너리들이 파생된 건 불가사의다. 동성애 뿌리는 깊다. 이미 수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 소돔과 고모라에 남색행위가 창궐하자 하나님이 유황불을 퍼부어 주민들을 멸절시켰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다.
미국도 한국도 성소수자 수는 알 수 없다. 인구조사에 관련 항목이 없다. UCLA의 윌리엄스 연구소가 2017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동성애자 커플은 64만6,500여 쌍으로 1,000 가구당 5.56 가구 꼴이었다. 전국에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은 주는 캘리포니아로 9만8,153 커플이었고 뉴욕(4만8,932 쌍)과 플로리다(4만8,496 쌍)가 그 뒤를 이었다.
미국의 성소수자들은 3명 중 1명꼴로 차별을 당한다. 시카고대학 조사보고서(2020년)는 전체 응답자의 36%가 차별을 경험한 것으로 집계했다.
야릇한 성정체성으로 심신이 고달픈 성소수자들에겐 연간 하루뿐인 퀴어 축제가 광복절 같은 날이다. 미국 ‘성소수자의 달’이었던 지난달 LA에선 할리웃 거리와 사우스 LA 등 여러 곳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뉴욕, 워싱턴 DC. 샌프란시스코, 덴버 등 다른 대도시에서 펼쳐진 퍼레이드는 더 요란했다.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라는 자못 비장한 슬로건을 내건 이번 서울 퀴어 축제의 참가자는 1만3,000여명이었다. 지척에서 동시에 벌어진 동성애 반대시위 참가자는 1만5,000여명이었다. TV뉴스를 보며 촛불시위대와 태극기시위대의 극한대결 모습이 오버랩 돼 마음이 착잡했다. 우리 동네 주민들처럼 집 앞에 깃발로 찬반표시를 하면 보는 사람들 마음이 훨씬 편할 터이다. 교통이 마비될 염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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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