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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밸리 동포사회의 거인들

2022-07-23 (토) 김덕환 팔로알토 부동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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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의 문화예술계에는 큰 별과 같은 분들이 많이 계시다. 연전에는 1966년 ‘에뜨랑제여 그대의 고향은’이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1985년 KBS 라디오에서 ‘한국의 소설 30편’에 선정돼 특별기획 ‘소설극장’으로도 전파를 타 많은 한국인의 사랑을 받은 소설가 신예선 선생님과의 인연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또 한분은 소설가이자 극작가, 영화인 그리고 ‘박은주 새싹문학회’와 ‘실리콘밸리 라이더스 그룹’의 설립자겸 회장, 신사임당 사모회 회장 등 팔순 중반의 연세에도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박은주 선생님이시다.

선생님을 뵈면 넘지 못할 사차원의 벽, 즉 넘사벽의 거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뭇 이민자들의 심금을 울린 자전적 소설 ‘고백’(1995) 등 5~6권의 수준 높은 저서를 내셨는데, 이 책들이 보통 감동을 주는 평범한 책들이 아닌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선생님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자연히 알게 된다.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한 일본해군 조종사 아버지와 조선인 모친사이에 태어난 일본계로 종전 후 모친을 따라 조선으로 돌아와 유년시절을 보내며 ‘쪽바리’라며 친구들에게 피맺히게 놀림당하며 자란 도입부의 이야기는 마치 고 박경리 선생님의 대하소설 ‘토지’의 도입부에서 하동 최참판댁 뒷산 바람 부는 자정의 대숲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대목과 비슷하다.


형인 우관선사가 있는 지리산 연곡사에서 휴양차 지내던 정읍출신의 동합접주 김개주가 불공드리러 온 하동 최참판댁 윤씨 부인을 겁탈해 비밀리에 혼외자로 태어난 후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집에 하인으로 잠입해 살던 구천이(김환)가 이부 형인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의 부인(형수)인 별당아씨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규하는 대목을 읽으며 스무살의 내가 받았던 그날의 충격처럼 범상치 않다.

6년 걸쳐 한국일보에 애면글면 연재한 수필을 모아 고작 1권의 수필집을 내고서도 나는 이리 우쭐한데 여러 권의 소설을 쓰시고 교민들에 대한 계몽운동에도 그렇게 열심인 이분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대체 차원이 다른 분들로 정말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일 전 박 선생님의 남편이 항암투병 끝에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인터넷 바람결에 전해 듣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자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의 작품이 담긴 신간 서적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히 받아왔다. 이분들은 정말 거인들이다.

나는 좀더 원대한 행보를 취하지 못해 지금껏 반성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일생을 통해 취미라 할 만큼 즐기고 살았던 달리기. 하프 마라톤부터 시작해 풀코스를 뛰어야지 했던 것이 결국 풀코스를 한번도 달리지 못하고 무릎에 이상이 온 것이다.

삼십대 초반인 1992년경인지 모 일간지 하프마라톤, 설악 하프 마라톤 등에 참가하며 총 6회의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지만 이후 풀코스는 이런저런 인생의 핑계의 결로 결국 한번도 뛰어보지 못한 것이다. 굳이 억지로 갖다 붙인다면 1993년에 있었던 불암, 수락산 양대산에 걸쳐 진행된 대회가 25km 였지만 험준한 산악에서 이뤄진데다 4시간55분를 기록해 5시간 이내라는 제한을 뚫고 완주했던 대회를 풀코스 마라톤에 비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때 마지막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기진맥진한 나는 거의 임사체험(?)을 했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피로감에 쩔었던 것이다. 간신히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산길위에 널브러진 그 순간이라니…. 대회를 마치고 한숨 돌리러 찾은 중계동의 사우나에서 나는 왼쪽 엄지발톱이 빠진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생을 두고 ‘처음부터 풀코스에 도전할 걸…’하며 후회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경구는 오늘도 느슨해진 나를 이렇게 다잡아준다.

<김덕환 팔로알토 부동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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