숱한 정치 분석가들은 공화당이 극단적이고 반민주적인 정당으로 변하고 있다며 지난 수년간 목이 쉬도록 경고했다. 트럼프가 선거결과에 불복하기 훨씬 이전, 그러니까 그를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하기도 전에 정치학자인 토마스 만과 노먼 온스타인은 공화당이 “사실과 증거 그리고 과학”을 거부하고 반대당의 적법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폭도 분견대”로 변질됐다고 꼬집었다.
지난 2019년 실시된 국제 서베이에서 전문가들은 민주적 기본원칙과 소수계 권리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기준으로 세계 각국의 정당을 평가했다. 놀랍게도 미국의 공화당은 서구의 중도우파 정당과 완전히 딴판인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미국은 헝가리의 피데스나 터키의 A.K.P.와 같은 독재 정당과 닮은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분석은 지나치게 과장됐다거나 불필요한 우려를 자아낸다는 이유로 종종 무시됐다. 공화당이 빅토르 오르반의 일당독재를 공공연히 미화하는 지금도 필자는 공화당을 피데스와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종종 마주친다. (왜 안 된다는 걸까? 직접투표에서 완패하더라도 공화당이 주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선거구를 재조정한 이른바 게리맨더링은 오르반의 ‘병법서’에 등장하는 대표적 선거 전략이다.) 그러나 파이낸셜 타임스의 에드워드 루스가 지적하듯 “지난 20년간 중요한 고비마다 경계론자들이 내지른 경고음은 빗나간 적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과거 며칠 동안, 우리는 공화당이 얼마나 급진적이 되었는지를 일러주는 사건과 마주쳤다. 지난해 1월6일 폭도들의 의사당 난입사태와 관련한 의회 청문회는 이들의 공격이 최고위층의 지시에 따라 선거결과를 뒤집으려는 보다 광범위한 계책이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조목조목 제시했다.
그런가하면 보수성향의 대법관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대법원은 낙태와 총기통제에 관한 당파색 짙은 해석을 내놓았다. 아마도 그게 끝이 아닐 것이다. 대법원이 정부의 자연보호 노력에 어떻게 제동을 걸지 우리 모두가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미국 민주주의의 생존가능성 이외에 필자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은 “어째서”이다. 공화당의 극단주의는 어디서 오는 걸까?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기세를 떨친 파시즘과의 비교가 불가피해 보이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첫째, 나쁜 대통령이긴 했지만 그래도 트럼프는 제 2의 히틀러나 무솔리니는 아니었다.
사실 마르코 루비오와 같은 공화당 의원들은 평균적인 좌파성향의 민주당 의원들을 수시로 막시스트라고 불렀고 민주당의 입장에선 그들의 과장을 역방향의 과장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유혹이 들겠지만 현실은 굳이 과장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극우화되어 있다.
파시즘의 발흥과 비교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는 또 있다. 1차와 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유럽에서 기세를 올린 우익 극단주의는 국가적 재난의 폐허에서 솟아났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불황의 덧에 치인 이탈리아의 경우는 패배처럼 느껴지는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였다.
미국에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2008년에 심각한 금융위기가 있었고, 더딘 경기회복이 뒤따른 것은 맞다. 지역 경제 사이의 극심한 차이가 발생했고, 뒤처진 지역에서 실업, 사회적 해이, 심지어 약물복용과 자살 등의 불미스런 결과가 나타난 것 또한 사실이다. 과거에 미국은 이보다 더 험한 일도 겪었지만, 주요 정당들은 민주주의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
공화당이 극단주의로 내닫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클린턴 시절에 있었던 마녀사냥과(힐러리가 빈스 포스터를 살해했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음모론, 정부 폐쇄 카드로 클린턴을 협박해 정치적 양보를 받아내려던 시도 등 당시의 광기어린 정치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미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던 호시절에 발생했다.
이건 수수께끼다. 필자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우익 극단주의가 판을 친 사례가 있는지 역사적 전례를 찾아보는데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건의 사례를 발견했다. 1920년대에 기록된 KKK단의 부상이다.
이 조직은 남북전쟁 이후에 나온 집단의 이름을 따왔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새로운 운동이었다. 분명 백인 민족주의 운동이지만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고, 순수한 테러 집단도 아니었다. KKK는 평화와 호황 속에서 여러 개의 주를 사실상 지배하는 등 절정기에 도달했다.
새로운 KKK는 대체 어떤 그룹인가? 필자는 린다 고든이 쓴 “KKK의 재림: 1920년대의 Ku Klux Klan과 미국의 정치적 전통”을 읽어보았다.
이 책은 변화하는 국가에 저항하는 지방과 소읍 출신 백인들의 반발을 묘사한다. KKK는 이민자들과 ‘도시 엘리트’를 혐오한다. 이 조직은 ‘과학 불신’과 ‘거대한 반 지성주의’로 특정된다. 어딘지 귀에 익숙하지 않은가?
OK. 현대의 공화당은 제 2의 KKK만큼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공화당의 극단주의는 분명 동력의 상당부분을 KKK와 동일한 원천에서 끌어온다. 게다가 공화당의 극단주의는 다양성과 다른 것에 대한 포용력 등 진정으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동인에 대한 혐오를 먹고 자라기 때문에 대응과정에서 양보나 절충은 절대 있을 수 없다. 공화당의 극단주의는 기필코 퇴출되어야 한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먼은 현재 뉴욕 시립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미국내 최고의 거시경제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MIT에서 3년 만에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뉴욕타임스 경제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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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