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의 여제’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동포 피아니스트 서혜경(62, 뉴욕)의 리사이틀을 9년전 시애틀의 베나로야 홀에서 감상했다. 혹독한 생활고 속에서 말기 유방암을 어렵게 이겨낸 서씨는 2008년 ‘피아니스트의 히말라야’로 불리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3번을 한 무대에서 연주했고 그의 모든 협주곡(5곡)도 앨범으로 내 재기했다며 “둘 다 여성 피아니스트로는 최초”라고 소개했다.
카네기홀 선정(1988년) 세계 3대 피아니스트 중 하나인 서씨는 러시아 음악 전문 연주자이다. 그녀는 전성기였던 1989년 한국을 방문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연주시간이 길고 테크닉이 엄청 어려워 ‘코끼리 협주곡’이라는 별명이 붙은 곡이다. 서씨는 작년 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데뷔 50주년 기념 연주회에서도 같은 곡을 협연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적 협주곡은 3번 아닌 2번이다. 베토벤 5번(‘황제’), 차이콥스키-쇼팽-그리그의 1번들과 함께 ‘세계 5대 피아노 협주곡’에 낀다. 한국에선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이 베토벤 교향곡 5번(‘운명’)과 9번(‘합창’), 비발디 ‘4계,’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드보르작 교향곡 9번(‘신세계에서’) 등을 누르고 10대 인기 클래식 곡 중 1위로 꼽혔다는 조사(2015년)도 있었다.
나는 Rachmaninoff를 ‘라치마니노프’로 읽었던 반세기 전 동료 여기자와 데이트하며 2번 협주곡 공연을 듣고 시쳇말로 뿅 갔다. 팝송 ‘Full Moon And Empty Arms(만월과 허전한 품)‘가 이 곡의 제3악장 주제임을 나중에 알았다. 프랭크 시나트라, 에디 피셔, 페리 코모, 로버트 굴레 등이 부른 이 팝송은 떠나간 연인이 “다음 보름달이 뜰 때는 돌아와 텅 빈 내 품에 안겨주기를” 희구한다.
그동안 3번 협주곡도 몇 번 들었지만 별로였다. 2번 같은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가 지난주 밴 클라이번 피아노콩쿠르 결선에서 이곡을 연주한 임윤찬의 동영상을 보며 넋이 빠졌다. 30여년전 서혜경의 ‘폭풍 건반’이 재현된 듯 했다. 그의 연주에 감동한 지휘자가 눈물을 훔쳤고 모든 청중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베벌리 힐스에서 죽은 라흐마니노프 본인도 생전에 이런 환호는 못 받았을 터이다.
임윤찬은 밴 클라이번 콩쿠르 60년 사상 최연소(18세) 우승자다. 피아노를 딱 10년 전에 시작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외국유학 물을 먹지 않은 순수 국내파다. 서혜경씨 등 다른 ‘신동’들처럼 부모의 극성스런 압박을 받지도 않았다. 이미 테크닉, 곡 해석, 음악성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는 평을 받는 그의 연주가 10년후 어떤 모습으로 더욱 발전해 있을 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윤찬의 쾌거는 글로벌 트렌드가 된 BTS의 K-팝뿐 아니라 K-클래식도 만개했음을 확인해줬다. 임동민·임동혁(2005년 쇼팽 콩쿠르 공동 3위), 손열음(2011년 차이콥스키 2위), 조성진(2015년 쇼팽 우승), 문지영(2015년 부조니 우승), 선우예권(2017년 밴 클라이번 우승), 박재홍(2021년 부조니 우승) 등이 잇달아 영예를 안았다. 첼리스트 최하영은 지난달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쇼팽·차이콥스키·퀸엘리자베스 등 세계 3대 콩쿠르와 맞먹는 권위의 밴 클라이번 경연에서 두 대회 연속 한국인 우승자가 나왔다는 것도 매우 획기적이다. 올 대회에선 준결승에 진출한 한국인만 4명이었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도 결선 진출자 12명 중 한국인이 최하영을 포함해 4명이었다. 이젠 국제 콩쿠르마다 한국인 참가자들이 외국인 아닌 자국 라이벌들과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요즘 한국은 모든 면(정치만 빼고)에서 약진한다. 반도체 본산인 경제대국이자 첨단 인공위성을 띄운 기술 강소국이다. 손흥민(축구), 황선우(수영), 우상혁(높이뛰기) 같은 스포츠 스타들이 속출해 체력이 국력임을 과시한다. 제2, 제3의 임윤찬도 계속 나올 터이다. 아직은 별 기미가 없지만 노벨 문학상을 받는 한국문인이 나올 날도 머지않다고 확신한다. 우린 세계최고 글자인 한글을 쓴다.
<
윤여춘 전 시애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