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병용 화백을 그리워하며

2022-06-23 (목)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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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출신인 고 이병용(1948~2001) 화백의 21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업적을 돌아본다. 1970년대 초 한국화단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아방가르드 그룹 ‘에스프리(Esprit)’의 창립 멤버였고 리더였으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한국 미술계의 선구자였다. ‘F-77’이란 서양화 비구상 작품으로 국전(대한민국미술대전)에도 입선한 장래가 밝은 미술가였다. 그렇게 명성을 얻어가던 그가 30대에 뉴욕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세계미술의 메카 뉴욕에서 인정받아야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뉴욕시절의 이병용 화백은 가난한 한국 화가들의 보호자였다.

40대가 되어 하와이 본토인 ‘힐로’(Hillo, 빅아일랜드)로 이주한 것은 소아과 의사인 아내를 따라서였다. 그가 하와이 한인회장으로 있던 2000년, 필자를 그곳으로 초대하여 방문한 일이 있었다. 처음으로 안내한 곳은 이민선조들이 묻혀있는 힐로의 알라이 공동묘지였다. 당시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알라이 공동묘지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알라이 공동묘지는 네모난 구역을 절반으로 나누어 좌측은 일본묘역, 우측은 한국묘역으로 되어있었는데 일본묘역은 봉분도 온전히 살아있고, 묘비며 잔디도 잘 손질되어 보기에 좋았지만 한국묘역은 오랫동안 방치하고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비석은 제멋대로 쓰러지거나 절반쯤 파묻혀있었고, 봉분은 흔적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무너져내려있었으며 잔디를 깎지 않아 잡초만이 무성한 폐허처럼 변해있었다. 선명히 눈에 띄는 것은 좌측은 일본인 묘역이고, 우측은 한국인 묘역이라고 써놓은 경계석뿐이었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아오름을 느꼈다. 지금 우리의 조국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다. 이민 선조, 그들의 애국심, 희생이 밑거름이 되지 않았던가?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땅콩농장의 노동자로 노예처럼 살아가면서도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라며 이승만에게, 만주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거두어 보냈던 분들이다. 우리 후손들이 어찌 그들의 나라사랑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자녀들이 대부분 본토로 이주해버려 그들이 묻힌 알라이 공동묘지는 돌보는 이가 없어 당시 내가 바라본 풍경 그대로 폐허나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일본사람 묘역과 같은 곳에 있어야했을까?

이 처참한 현실을 본 이병용 한인회장이 ‘묘역단장사업’을 결심했다. 그는 힘도 능력도 없었지만 옳은 일이고, 후손들 가운데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라는 열정하나로 ‘알라이 이민선조 공동묘역 재단장사업’이라는 100만달러가 필요한 사업계획서 한장을 들고 도움 받을만한 기관이나 단체들을 찾아 나섰던 것이다.

국가 보훈처를 찾아가서 그들을 감동시켰고, 대리석 위령탑 제작을 위해서는 홍익대학 은사인 박서보 화백(당시 한국미술가협회장)에게 부탁드렸으며, 엄청난 무게의 위령탑을 운반하기위해서는 대한항공에 협조를 구했다. 그 외에도 많은 뜻있는 교민들의 정성어린 성금과 도움으로 지금의 빛나는 위령탑을 세웠고, 묘비를 새로 제작해서 제자리에 놓았으며, 봉분을 새로 만들었고, 잔디를 입혀서 새색시가 신부화장 한 것처럼 단장을 했다. 일본묘역과 한국묘역의 위상이 달라졌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병용화백은 한인사회를 위해 큰일을 한 어른이었다. 2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이민 100주년이 넘었다. 그동안 또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이병용 화백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을 사랑했던 선조들의 묘역을 돌보는 일, 잊어서는 안 되겠다.

<제이슨 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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