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파더스데이가 다가오지만, 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의 모습도 그의 음성도 기억할 것이 전무하다. 이러한 기억의 결핍은 어떤 면에서 편안하기도 하다. 아무것도 기억할 것이 없음으로 그리움도 원망할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끔 중후한 모습의 중년 어른을 보면, 저런 분이 내 아버지라면 어떤 기분일까, ‘참 괜찮겠지…” 잠시 속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한 친구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그룹 중에 나와 꽤 가까운 사이였던 친구의 생일이 만우절인 4월1일이었다. 그 친구는 우리들 중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 속했고, 대한극장 뒤 필동의 큰 이층집에 살고 있었는데 4월1일이 자기 생일이라며 우리들을 초대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무도 안 오고 덩그러니 나 혼자만 와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물으니 “만우절 거짓말인 줄 알고 해마다 아무도 안와.” “몇 해만에 네가 처음 온 거야“라며 친구가 웃었다.
평양이 고향인 그 친구 엄마가 꿩으로 국물을 낸 이북식 만두국과 진미를 차려 주셔서 친구와 단 둘이만 생일상을 받고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날이 마침 만우절 4월1일이기도 했었지만 바로 그 친구 아버지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중후한 어른이다. 그 애 어머니도 다정하신 분이었지만 그 친구 아버지를 보면서 친구를 속으로 많이 부러워했었던 생각이 난다. 친구 아버지는 마땅한 부지를 사서 노동자들과 함께 집을 한 채씩 예쁘게 지어서 파는 설계사이며 개인 건축가였다.
내 친구는 속이 깊고 조용한 아이였는데 언젠가 내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뜨거운 공사장에서 까맣게 탄 얼굴로 일하고 계시는 우리 아버지 모습을 보면 가슴속이 쓰리고 아파!”라고 해서 내심 놀랐다. 아버지에 대한 친구의 남다른 사랑에 샘이 나기도 했지만, 친구가 나긋나긋하게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어감 속의 세 글자 ‘아버지’란 단어가 내게는 너무도 낯설고 생소해서 잠시 친구가 밉기까지 했던 까마득한 옛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한 번도 소리 내어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나의 아버지도, 속으로 남몰래 부러워했었던 그 친구의 아버지도 지금은 두 분 다 이 세상에 안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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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옥 / 샌프란시스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