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선회를 못 먹는다. 난생 처음 활어회 식당에 갔을 때, 널따란 접시 위에 결 따라 저며져 투명한 살점으로 누워있던 생선이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얼핏 내려다본 상 위에서 우리 둘의 눈이 딱 마주쳤다. 헉!
한국에서 한번은 남쪽 항구도시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시장이 우리 일행을 접대한 곳은 이름난 활어식당. 반갑게 맞이하는 여주인에게 시장님이 호기롭게 주문했다. “특별히 펄펄 뛰는 눔으루다가!” 이미 뿌러지고 있는 상다리 중앙에 날라져온 ‘그분’께서는 차가운 접시 위에서 아직도 미끄덩한 꼬랑지를 철퍽거렸다. 그 옆에는 자기 껍질 위에 누워 움찔거리는 전복. 다시 그 옆으로는 창졸간에 토막 난 낙지들이 참기름 발린 흰 접시 위에서 기를 쓰고 동강 난 지체들을 움직였다.
나는 화장실 가는 척 일어나,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고는 가까운데 놓인 미역무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때 주방장이 커다란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일행들이 일제히 “와아!” 손뼉을 치며 반긴 하이라이트 쟁반 위에는, 아 글쎄!..... 멀쩡히 살아있는 보리 통새우들이! 일본말로 춤춘다는 뜻이라나. 손바닥 길이를 넘는 새우오도리 예닐곱 마리가 펄쩍펄쩍 점핑을 하는데 일행이 돌아가며 한 마리씩 손바닥으로 낚아채서는 그대로 입 안에 밀어 넣었다. 기절 직전인 나를 위해 내 몫까지 처리해줬던 옆자리 동료를 난 지금껏 생명의 은인으로 모신다.
누구나 한두 가지 가리는 음식이 있다. 오이가 질색이라는 남자들에게 물어보면 그건 여자들이 얼굴에 붙이는 마사지 재료이지 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싱싱한 생굴은 불쾌한 모양새에 물컹거려서, 홍어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가자미 식혜는 발효한 생선 이름에 ‘식혜’란 단어가 웬 말이라서, 닭발은 생김새가 그대로 발 모양인 게 징그럽고, 소천엽은 표면이 우둘두둘 더러워진 타월 같아서, 감자탕은 돼지뼈에 붙어있는 노란 힘줄이 곧 척수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본래 이 척수의 다른 이름이 ‘감자’이다), 순대는 안에 돼지 피(선지)가 들어가서 등등 사연은 제각각이다.
고기를 사랑하는 미식가들은 돼지껍데기 맛이 일품이라는데 비계덩이 껍질을 뚫고 털마저 숭숭 난 걸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추어탕은 대개 무청 시래기에 맷돌로 미꾸라지를 갈아 만드는 게 정식이라지만 때로 통미꾸라지도 등장한다. “펄펄 끓는 육수에 생미꾸라지를 투하하면 이 녀석들이 앗 뜨거! 앗 뜨거! 하면서 그 옆에 두부 속으로 파고들지요. 나중에 두부를 썰었을 때 반 토막 난 미꾸라지 씹는 그 맛을 그대는 진정 모른단 말입니까? 우핫핫핫!”
밥풀 흘리는 아이들과 한 상에서 밥을 못 먹는 친구도 있고 남의 아이가 남긴 밥까지 걷어먹는 비위 좋은 친구도 있다. 옳고 그른 건 없다. 그저 각자 입맛이 다를 뿐이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오래 전 ‘야채주의자’가 되었다. 최고급 필레 미뇽 아니고, 와규 비프 아니고, 메인 주의 랍스터 아니고...... 값비싼 고급 메뉴 대신 나에게 잊지 못할 음식은 강릉 선교장 부근 백반집 주인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누룽지다. 입맛은 심리적이며 심정적이다. 그리운 고향땅의 푸근한 손맛이 누룽지 사발에 담겼으리라는 나의 서정이 이입된 까닭이다. 누룽지! 뜨거운 가마솥 밑바닥에 깔린 채 타오르는 장작불길의 고통을 겪어냈을, 자신의 온몸을 태우면서도 표독해지긴 커녕 깊고 구수해진 누룽지가 나는 고맙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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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