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둘째 아이를 낳은 재미교포 A씨는 요새 남편에게 큰소리치며 살고 있다. 그는 아이를 낳고 1,000달러어치의 분유를 샀다가 “왜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샀느냐”는 남편의 타박을 들었다. 하지만 분유 대란을 겪는 지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그때 “무리해서 사기를 잘했다”는 칭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분유 대란이 심각하다. 어린아이를 둔 부모들에게는 심각하다는 말로 부족하다. 비극이다. 대형 마트 몇 군데를 돌아도 분유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시밀락과 엔파밀처럼 인기 있는 분유는 매대에 없고 온라인에서는 ‘주문불가(not available)’다. 집 근처 타깃 매장 직원에게 물어보니 “언제 들어올지 정확히 모른다”며 “근처에는 맨해튼의 브롱스 매장에 엔파밀 분유가 몇 개 남아 있는 듯하니 그곳에 가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2020년 코로나19 록다운 때도 물건이 없었다. 샘물을 구하지 못해 정수를 사야했고 페이퍼타월은 한동안 구경도 못하고 지낸 적이 있다. 바이러스와 세균을 없앤다는 클로락스 티슈도 몇 달간 살 수 없었다. 텅텅 빈 스파게티면 코너에서 낙담하고 한 번에 1인당 우유 2통만 살 수 있었던 때도 있었지만 나를 포함해 미국인들도 그렇게 비극적이지는 않았다. 다른 음식을 해 먹으면 됐고 마트를 한 군데 더 가면 필요한 만큼 물건을 구할 수 있었다. 원하는 브랜드나 품질이 아니어도 대체할 것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아기들이 먹는 분유다. 주재원 B씨는 “아이 밥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말 다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유 수유를 하는 주재원 C씨 가정은 최근 사태에 한숨을 돌리고 있지만 또 다른 D씨는 유럽에서 분유를 직구하고 있다.
미국 분유의 품절률은 현재 45%에 달한다. 지난해 이맘때는 6.1% 수준이었다. 폭스뉴스에 따르면 6명 이상의 아기가 분유가 없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분유가 조 바이든 행정부를 심판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공급망 문제에 2월 애보트사의 리콜이 겹쳤다지만 그것만으로 책임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방물자조달법을 발동하고 유럽에서 추가로 수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완전한 문제 해결에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상승한 분유 가격은 저소득층에 치명타다. CNN은 “분유 부족 사태는 안 그래도 어려운 중간선거 상황에 또 하나의 정치적 상처를 남겼다”며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백악관은 위기 모드로 내던져졌다”고 지적했다.
이미 미국 가정은 부담이 크다. 치솟는 인플레이션으로 장바구니 물가가 덩달아 뛰고 있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지만 집주인이 렌트 계약 갱신 때 월 1,000달러 안팎을 올려달라고 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휘발유 값도 갤런당 4~6달러 수준까지 상승했다.
얼마 전부터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의 인플레이션을 “블라디미르 푸틴이 일으킨 인플레이션”이라고 하고 있다.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가와 곡물·원자재 가격을 올린 것은 맞지만 이전부터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심각했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지난해 봄부터 과열 문제를 거론해왔다. 비극의 씨앗은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물가 상승이 일시적이라는 논리를 펴면서 인플레이션에 손을 놓은 지난해에 뿌려졌다. 전쟁과 코로나19까지 미국이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8%대를 넘어 두 자릿수의 물가 상승률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은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분유 사태는 엎친 데 덮친 꼴이다. 젊은 유권자들 중 상당수는 이번 일로 정부의 정책 대응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어떤 나라든 핵심은 경제와 민생이다. 민주주의국가에서 경제와 민생을 놓치고 정권을 유지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이번 중간선거는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에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분유 사태와 높은 인플레이션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400억 달러 원조 법안에 서명했다”는 정치적 주장까지 나온다. 이것이 과도한 비난이었는지 아닌지는 5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중간선거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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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필 서울경제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