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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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열매

2022-05-20 (금) 김관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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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운동을 하는 목표 지점에는 오클랜드 주교좌 성당이 있다. 시간이 되면 성당 안에 들어가 잠깐 기도하고 나와 집으로 향하거나 호수 주변을 더 걷는다.

그날은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성당 앞에 운구차가 세워져있었다. 장례미사가 있구나, 짐작하며 시간을 물으니 미사 시간까지 다소의 여유가 있어 출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장례 준비로 어수선한 곳에 기도한답시고 오래 머물기가 민망해서 일어나는 순간 슬픔에 잠겨 입구로 걸어 나오는 사십 대 여인과 마주치게 되었다. 슬픔에도 아우라가 있다면 그녀의 전신은 슬픔의 아우라에 싸여있었다. 미망인이 되었나, 짐작하며 영정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맙소사!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고인은 십 대의 여성이었다. 여성이라 하기보다는 앳된 학생이라 함이 옳을 거 같았다.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 그 어머니의 아픔이 당장 내게 전이 되는 거였다. 그 통증은 쉬 사라지지 않고 하루종일 내 가슴을 흥건히 적셨다.


이십여 년 전, 미국에 미처 정착하기 전이었다. 작은 딸의 주선으로 우리 세 모녀는 어느 펜션에 묵은 적이 있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갈 나와 출산한 지 두 달 남짓한 언니를 위한 여행이었다. LA 근교 어디라 했는데 초저녁부터 늑대가 어슬렁거리는 깊은 산속이었다. 실내는 누가 와도 아쉽지 않게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준비된 아담한 장소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입구 장식대에 세워진 이십 대 여인의 사진이었다.

몇 년 전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딸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펜션을 지었으며 휴식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와서 이용할 수 있다는 설명문이 써 있었다. 그때도 충격을 받았지만 그 부모의 마음을 깊게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여자는 손주 한 명을 키워봐야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었다. 나는 한 명이 아니라 여섯 명의 손주가 태어나 손주바라기 할머니가 된 후에야 타인의 아픔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졸지에 딸의 험악한 죽음을 맞이한 부모가 여러 사람을 위한 쉼터를 마련하기까지의 수많은 날들의 고통을 누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오늘 마주친 젊은 어머니는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아파하고 슬퍼하며 앙가슴을 찧어야 할까. 부디 젊은 어머니가 고통의 시간을 딛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으면 하고 기원한다.

<김관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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