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대학으로 떠날 때 허전하면서도 한편 홀가분했다. 육아를 마쳤다는, 스스로를 향한 대견스런 해방감이었다. 집안은 갑자기 괴괴적적. “쿠키야, 이리 와. 밥 먹자!” 게을러빠진 털북숭이 개만 아니면 종일 말할 일도 없다. 등하교길 라이드가 면제되니 하루가 평화롭고 길다. 아아! 좋다!
그리고 얼마 안가 노년기 부모님을 돌보는 일이 시작됐다. 나의 부모도 그랬으리라. 나를 키워내고 그다음엔 그들의 부모를 돌보다가 그들이 늙어지면서 다시 떠나보냈던 자식으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전도서 1:9)” 아무것도 안하기엔 너무 길고, 뭘 해보기엔 너무 짧은 인생!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그 새벽, 나 홀로 지키던 병원 중환자실에는 호흡을 도와주는 기계음, 맥박과 산소포화도를 재는 환자 모니터의 삐이-삐이- 하는 경고음만 있을 뿐 사방이 고요했다. “아버지! 저 막내에요. 목에 낀 호스 때문에 말씀하실 수가 없어서 갑갑하시죠? 그래도 제 목소리를 들으실 거라 믿어요. 저를 낳아서 키우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도 아버지를 사랑해요.” 움직임도 없이 누워있던 아버지의 두 눈에서 눈물이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곧 모니터의 물결선이 가느다란 직선으로, 숫자들은 0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의 짤막한 시한부 투병 기간 동안 병원에서는 일반 음식을 철저히 금지시켰다. “아버지, 뭐든지 말씀하세요. 드시고 싶은 거, 하시고 싶은 거 있으면 저한테 살짝 알려주세요.” 아버지가 대답하셨다. “얘야, 담배를 딱 한 모금만 피워보고 싶구나.” 담당의사가 펄쩍 뛰었다. “그러다간 바로 끝이 됩니다.” 의사의 지시가 무서워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던 내가 진짜로 두려워한 건 무엇이었을까? 그냥 몰래 드릴걸…. 아직도 거리를 지나다 연세 드신 노인들이 후우~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를 떠올린다.
시어머니도 병원에서 임종을 맞으셨다. 씩씩하고 명랑하며 명석한 두뇌로 인생길 곳곳에 많은 흔적을 남기신 분. 미국에 사는 자녀들을 방문하러 오시는 길이 멀고 힘드셨을 텐데도, 공항 마중에 나가보면 가장 예쁜 투피스 정장으로 또각또각 걸어 나오며 말씀하셨다. “하하하… 너희들 체면 구길까봐.” 방문 기간 동안 “한자리에 모였으니 다 같이 찬양해야지!”하며 어머니는 피아노 뚜껑을 여시고는 악보도 없이 두어 시간 싱얼롱을 진행하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귀국하신 며칠 후 어이없게 넘어지셨다. 고관절 골절.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그러다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진 어머니는 떠나시기 며칠 전, 힘없이 병실 창밖을 내다보며 말씀하셨다. “얘들아, 나를 제발 집에 데려다다오. 저쪽 가로수 다음 길이 우리 집인데. 내 집에 가서 하룻밤만 자고나면 다 나을 것 같구나.” 우리는 어머니의 ‘딱 하룻밤’ 소원을 끝내 들어드리지 못했다. “어머니, 의사가 다 나아야 퇴원하실 수 있대요.” 큰 며느리는 큰 며느리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사랑받을 모든 이유를 굳이 찾아다가 선물로 주시면서 사랑을 베풀던 어머니는 창문 쪽으로 얼굴을 바란 채 눈을 감으셨다. 그때 그냥 쪼그매진 어머니를 업고 몰래 도망쳐 집에 모셔다드릴걸. 어머니날도, 아버지날도, 더 이상 특별한 날이 아니게 된 이제 와서야 후회로 마음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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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케이 임상심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