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프랑스 파리에서 3년간 주재 근무했을 때다. 거처를 정하자마자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알리앙스 프랑세즈 야간 기초반에 등록하였다. 등록증을 건네주던 여직원이 카셋 테이프 한 개를 내밀었다. 프랑스 문화를 이해하는 것도 프랑스어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영어로 말하였다. 자세히 보니 샹송 모음집이었다.
이브 몽땅, 살바토레 아다모, 에디트 피아프 등 내로라하는 프랑스 유명 샹송 가수의 노래가 여러 개 수록돼있었다. 그 중 에디트 피아프의 ‘메아 쿨파(Mea Culpa)’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천주교 신자라면 누구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 성찰치 못한 죄, 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를 고백하고 가슴을 치며 외우는 기도, ‘내 탓이요’의 바로 그 라틴말이었다. 유아세례를 받은 후 어머니 등에 업혀 다니기 시작한 성당에서 의미도 모르고 익히 들었던 베네딕뚜스, 세꿀라, 도미누스 보비스 꿈 등과 함께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그 ‘메아 쿨파’였다. 나의 최초의 라틴어, 그 메아 쿨파를 프랑스 파리에서 카셋 테이프로 만나다니 그저 기뻤다. 게다가 어머니의 단골 기도이었던 그 ‘내 탓이요’를 어찌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아니다 싶은 상황을 맞게 되면 언제나 어디서나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요’를 외우셨다. 구한말에 태어난 어머니는 3.1만세 운동 후 일제 억압이 한층 강화될 무렵 16살에 천주교 집안 대가족 맏며느리가 되셨다. 아내 며느리 어미로서 가문만을 위한 현모양처의 유교적 가부장 제도의 가치에 매인 삶이었다. 일제의 수탈기, 해방 후 혼란기와 민족상잔의 전란 중 남편과 둘째 아들을 잃은 아픔도 어머니는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기도로 버티셨다. 집안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생길 때도 어머니는 이 기도로 평정을 되찾곤 하셨던 것 같다. 큰 숨을 몰아쉬며 시작하는 어머니의 기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이 서려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 팔남매 중 외지에 나간 두 형님을 뺀 여섯 형제자매는 어머니 옆에 다소곳이 무릎 꿇고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를 따라 외우곤 하였다.
대학생이 된 나는 어머니의 신앙 자세에 대하여 좀 불편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일종의 자학행위라고 규정하였다. 세상은 어느 절대자의 의지만으로 움직여지는 것도 아니고 그럴만한 원인과 조건이 따른 결과로서 이루어진다는 이치를 이해시켜드리려 애쓰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라고 강조하자, 어머니는 ‘큰일 날 소리’라고 한마디 하시더니 눈물을 흘리며 내 손목을 꼭 잡고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수없이 외우셨다.
어머니 가신지 벌써 37년, 어머니의 ‘메아 쿨파’를 생각한다. 유럽에서 근무할 때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로마 관광을 갔다. 베드로 성당을 구경한 뒤 시간 맞춰 교황이 집전하는 바티칸광장 미사에 참석하였을 때였다. 어머니는 묵주를 꺼내시더니 난데없이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라고 외우셨다.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교황님 나라에서 교황님의 말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 용서해주십사 기도를 하고, 또 너희들 은혜도 간구하고 나니 가슴 속이 확 트인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용서를 빕니다. 당신은 남을 탓하는 것은 결코 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90 평생을 사셨습니다. 자식의 크고 작은 모든 잘못까지도 오로지 당신의 탓으로, 당신만이 보듬어야 할 인고로 믿으셨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 큰 탓이었습니다. 메아 쿨파, 메아 쿨파, 메아 막시마 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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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운 수필가>